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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기노 칼럼] 난간 없이 사유하기

성기노피처링대표 2026. 7. 10.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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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그룹 리센느 멤버 원이가 유튜브에서 '무섭노'라고 말하는 장면이 논란이 되고 있다. (사진=유튜브 동영상 캡처)

 

최근 한 걸그룹 멤버가 예능 유튜브 콘텐츠에서 무심코 던진 사투리 ‘무섭노’ 한마디가 정치권까지 번지는 논쟁으로 확산하고 있다. 발단은 그 방송을 본 한 방송사 PD가 아이돌의 사투리를 극우 커뮤니티 ‘일베’식 표현과 연결지으면서 시작됐다.

문화적 차이로 끝날 것 같던 논쟁은 조국 전 조국혁신당 대표가 참전하면서 ‘농담이 다큐가 되는’ 정치적 화마로 활활 불타오르고 있다. 조 전 대표는 “일베는 표준말 뒤에 기계적으로 ‘노’를 붙인다”는 이른바 감별법을 제시하면서 경상도 사투리 ‘~노’를 쓰면 안 된다는 취지로 말했다.

이에 반대 진영에서는 “말끝 하나로 사상을 검증하려 한다”는 반박이 나오며 순식간에 문화 논쟁이 정치 이념 대결로 번졌다. 급기야 “앞으로 일베에서 유행하는 말이 나오면 우리는 영영 그 표현을 못 쓰는 것이냐. 이렇게 일베에 발목이 잡혀 살 수 있느냐”는 불만도 나오고 있다.

사실 이 문제는 어느 한쪽의 승패를 가리는 식으로 접근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무엇보다 이 논란의 배경에는 한 전직 대통령의 비극적인 죽음과 그를 둘러싼 오랜 정치적 상처가 관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피해와 기억이 얽혀 있는 문제인 만큼 누구에게는 단순한 말버릇이, 다른 누구에게는 깊은 모욕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그래서 더욱 성급한 단죄도, 무조건적인 면죄부도 경계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럴 때 대체 어떤 준거점에 기대 이런 논란을 판단해야 할까. 진영도, 과거의 상처도, 익숙한 잣대도 온전한 답이 되지 못한다면 말이다. 이 질문과 평생 씨름한 철학자가 있다. 한나 아렌트(1906~1975)다.

독일계 유대인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나치 전체주의의 탄생을 직접 목격했다. 그가 평생 파고든 질문은 왜 지극히 평범한 독일 국민들이 그토록 쉽게 한 개인을, 인종이나 계급이라는 범주로 뭉뚱그려 판단하고 심지어 절멸의 대상으로까지 삼는 데 ‘동의’했거나 방관할 수 있었는지 그 이유를 규명하는 것이었다. 그가 도달한 답은, 사람들이 스스로 사유하기를 멈추고 이미 주어진 이념과 진영의 틀에 판단을 오롯이 맡겨버렸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사실 한 아이돌의 '무섭노' 논란은 단순한 '말장난'이나 '언어 자유'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사회가 폭력적 정치사를 어떻게 기억하고 그 기억 위에서 개인의 존엄성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를 시험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여기서 한나 아렌트의 정치 에세이집 ‘난간 없이 사유하기’(문예출판사 2023)가 던지는 메시지를 떠올려볼 수 있다.

한나 아렌트는 개인의 존엄성이 지켜지고 집단의 폭력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난간 없이 사유하기’라는 방법을 통해 실천할 수 있다고 보았다. 전통과 권위, 진영과 이념, 선입견 등의 ‘난간’을 붙잡은 채 오르내리면 편하다.

하지만 아렌트는 그런 안락한 사고를 가장 위험한 것으로 보았다. 그는 전범 아이히만의 재판을 지켜보며 뜻밖의 사실을 발견한다. 아이히만은 광기에 사로잡힌 괴물이 아니라 조직의 명령과 체제의 논리에 자신을 맡긴 평범한 관료였다는 것이다.

아렌트에게 그것은 '난간 없이 사유하지 못한 인간'의 전형이었다. 사유를 멈추고 주어진 권위와 틀에 기댄 순간 누구든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는 데 가담할 수 있다는 것. 난간을 잡는 순간 우리는 눈앞의 사람이 아니라 그가 속한 범주부터 보게 되고 판단은 사유가 아니라 관성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다시 ‘~노’ 논쟁으로 돌아와 보자.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난간을 붙잡고 있다. 누군가는 진영이라는 난간을, 누군가는 자유라는 난간을, 또 누군가는 오래된 상처의 기억이라는 난간을 붙잡은 채 한 개인의 말 한마디를 심판하고 있다.

일베가 노무현 전 대통령을 조롱하며 저지른 폭력은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그 상처와 기억이 오늘의 또 다른 개인을 함부로 재단하는 기준이 되어서도 안 된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진영이라는 난간에 기대는 게 아니라 그 손을 놓고 한 사람을 한 사람으로 바라보는 용기와 연습이다. 사회가 만들어 놓은 난간에 기대 권위와 이념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순간 평범한 사람도 악의 공범이 될 수 있다.

 

*이 글은 2026년 7월 10일자 투데이신문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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