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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기노 칼럼] 정원오 낙마 미스터리

성기노피처링대표 2026. 6. 5.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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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9일 정원오 당시 민주당 서울시장 예비후보가 출마선언을 하고 있다. (사진=정원오tv  영상 캡처)

 

정원오 더불어민주당 전 성동구청장이 지난 3월 11일 국회 소통관 기자실을 방문했다. 서울시장 출마를 앞둔 예비후보로서 기자들에게 첫 인사를 하는 자리였다.

구청장을 3선 하면서도 주민 행정 만족도가 90%를 넘는다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과연 그 비결이 무엇일지, 그와의 첫 만남에서 뭔가를 발견하려고 촉수를 곤두세웠다. 그와 명함을 주고받으며 악수를 했다.

그런데 기대가 무색할 만큼 정 전 구청장은 평범했다. 부드러운 첫 인상에 다소 ‘샌님’같은 분위기가 느껴졌다. 그래도 구청장 12년 동안 산전수전 다 겪으면서도 그 수많은 민원과 ‘트집’을 응대하면서 쌓은 그만의 정치적 자산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서울시 전체를 쥐고 흔들 만큼의 결기나 아우라가 느껴지지 않아 내 기대가 과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정치부 기자의 오랜 촉과 직관으로 볼 때 무언가 결정적인 한 발이 보이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었다.

결국 정원오 전 구청장은 패했다. 대권도전으로도 직행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정원오 전 구청장은 너무도 헛되이 날려버렸다. 도대체 정원오의 패배는 무엇 때문이었을까.

민주당이 당 지지율만 믿고 너무 소극적으로 캠페인을 한 것도 있고 정 전 구청장 또한 선거는 오롯이 후보의 개인 열정과 의지로 돌파해야 하는데 ‘그냥 되겠지’ 하는 안일한 태도가 덧대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선거를 조금 떨어져서 보면 정원오의 패배에는 더 본질적인 점이 있다. 바로 ‘자기만의 정치’를 유권자들에게 강하게 각인시키지 못했다는 것이다. 좋은 사람, 유능한 행정가라는 평가는 있었지만 정치인은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유권자는 결국 자기 삶과 시대를 대신 싸워줄 ‘캐릭터’를 찾는다. 이런 점에서 정치인은 자기만의 세계를 가질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보수든 진보든, 극우든 극좌든, 유권자는 결국 자신만의 색깔과 확신을 가진 사람에게 끌린다. 정치란 거대한 오디션 프로그램과도 비슷하다. 정책도 중요하지만 그 이전에 ‘저 사람이 어떤 인간인가’를 먼저 본다.

때로는 약간의 나르시시즘조차 필요하다(어떤 대권주자는 그런 경향이 너무 강하고 넘친다). 물론 그것이 자기 도취와 독선으로 흐르면 위험하다. 하지만 그것이 완전히 결여돼도 정치인은 더 큰 무대로 치고 올라가기 어렵다.

노무현 이명박 등 과거 대권주자들을 처음 봤을 때 호.불호와 별개로 굉장한 자기확신이 느껴졌다. “나는 결국 더 큰 곳으로 간다”는 기운이 사람을 압도했다. 그 확신이 실제 능력과 일치하느냐는 별개의 문제다. 하지만 정치에서는 그 자기확신 자체가 이미 하나의 힘으로 작동하는 경우를 많이 봐왔다.

막스 베버는 그의 저서 ‘직업으로서의 정치’에서 정치인에게 필요한 자질로 열정과 책임감, 그리고 균형감각을 말했다. 여기서 베버가 말한 열정이란 맹목적인 흥분이 아니라 대의에 대한 전적인 헌신이자 타협할 수 없는 소신을 의미한다. 이러한 소신은 거저 주어지지 않는다. 평소 치열하게 단련된 생각 근육의 결과물이자 자기확신 연마의 결정체다.

구청장에서 서울시장으로, 혹은 평범한 신인에서 중앙의 지도자로 점프하기 위해서는 타인에게 확신을 주기 전에 먼저 스스로에 대한 지독한 확신이 선행되어야 한다. 자신을 신뢰하는 건강한 나르시시즘이 결여된 정치인은 격랑의 정치판에서 생존할 수 없다. 자기 한계와 꿈의 크기는 결국 스스로 만드는 것이지 대통령이나 중앙당이 대신 만들어줄 수 없는 것이다.

이번에 정원오 전 구청장이 실패했지만 좌절하지 말았으면 한다. 또한 패배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지도 말았으면 한다. 정치인이 남 탓을 하는 순간 자기 연민의 늪으로 빠져들기 쉽다. 영국의 시인 D.H 로렌스는 그의 시 ‘자기 연민(self-pity)’에서 이렇게 읊조렸다.

“나는 야생의 동물이 자기 연민에 빠진 것을 본 적이 없다. 얼어 죽은 작은 새가 나뭇가지에서 떨어질 때도 그 새는 자신의 존재에 대하여 슬퍼해 본 적도 없었으리라.”

정치판이라는 냉혹한 야생에서 스스로를 동정하거나 주변 환경을 원망하는 존재는 결코 권력을 쟁취할 수 없다. 유권자들에게 ‘나의 온전한 아우라를 증명하지 못한 내공 부족이었다’고 겸허히 인정하되 그 패배의 상흔이 ‘자기 확신’을 한층 더 단단하게 벼리는 계기로 작용했으면 한다.

정원오는 아직 정치적으로 끝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지금부터가 시작일 수도 있다. 다만 더 큰 정치인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유권자들에게 “왜 반드시 정원오여야 하는가”를 강하게 각인시키는 자신만의 색깔과 아우라를 만들어내야 한다.

그것은 타고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오랜 시간 자기 내면을 단련하고 스스로를 밀어붙이며 만들어낼 수도 있다. 정치인은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한 사람만이 살아남는다. 그리고 그것은 비단 정치만의 이야기도 아니다. 어느 직업이든 자기만의 언어와 신념, 자기만의 아우라를 가진 사람만이 결국 더 멀리 간다. 끝까지 자신의 세계를 의심하지 않은 자가 시대를 넘어선다.

 

*이 글은 2026년 6월 5일자 투데이신문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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