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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기노 칼럼] KBS 사장 ‘교체’와 윤석열 대통령의 ‘희극’

성기노피처링대표 2023. 11. 17.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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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 KBS 사장이 11월 14일 대국민 기자회견을 열고 불공정 편파 보도 논란에 사과했다. (사진=KBS 제공)

 

 

그리스 아테네에서 전철을 타고 아크로폴리스 역에 내리면 웅장한 언덕과 성채가 나타난다. 고대 그리스의 유적들이 즐비한 이 곳에는 기원전 600년에 만들어진 인류 최초의 극장 디오니소스의 흔적도 남아 있다. 고대 그리스 인들은 이 디오니소스 극장에서 연극을 최초로 공연했다.

당시 고대 그리스 국가는 디오니소스 극장에서 비극을 소재로 한 연극을 가장 많이 올렸다. 그리스 권력자들은 신화 속 영웅이 한 순간의 실수로 나락에 떨어져 고통 받는 모습을 더욱 비극적으로 그려 인간은 누구도 교만하거나 자만해서는 안 되며 신과 운명 앞에서 겸손할 것을 사람들에게 은근히 바랐다.

고대 그리스는 비극 공연을 통해 아테네 시민들에게 지금의 현실과 체제가 최상이라는 허상을 끊임없이 ‘주입’하려 했다. 사람들은 비극을 통해 눈물을 쏟으면서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불행한 영웅이 되지 않은 것에 만족해하면서 현실에 순응해 살아갈 힘도 얻었다.

당시 고대 그리스 국가는 연극을 보러온 관객들에게 오히려 관람료를 줄 정도로 ‘비극의 설파’에 열심이었다. 또한 디오니소스 극장은 약 17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규모였다고 한다. 당시 아테네 인구가 약 15만명 정도로 추산되는데 도시 전체 인구의 10분의 1을 수용할 정도로 거대한 규모였다. 고대 그리스 권력자들이 비극의 교훈을 통해 사람들의 저항과 불만을 얼마나 강하게 묶어두려고 했는지, 그 욕망의 척도가 17000명 수용 규모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권력에 순응하도록 사람들의 생각을 ‘세뇌’시키는, 지금으로 치면 일종의 ‘정부 프로파간다’ 역할을 바로 고대 그리스의 디오니소스 극장이 비극 공연을 통해 했던 것이다. 이렇게 고대 그리스 시대 '극장의 기능'을 길게 설명한 까닭은 권력자의 ‘프로파간다 유혹’은 기원전 600년 전이나 지금이나 하나도 변하지 않고 똑같다는 것을 요즘 KBS 사태를 보며 절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KBS 박장범 신임 앵커가 지난 11월 14일 뉴스9에서 박민 사장이 이날 기자회견에서 언급한 과거 불공정 보도 사례를 제시하고 있다. (사진=KBS 뉴스9 영상 캡처)


한때 ‘땡전 뉴스’(전두환 군사 정권 시절 9시 뉴스 시작과 독재자의 근황이 가장 먼저 보도되는 것)의 오명을 뒤집어썼던 전형적인 ‘정부 프로파간다’ 방송 KBS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사장이 바뀌고 그때마다 누구에게인지 모를 ‘대 국민 사과’를 하는 악습을 반복했다.

그리고 이번에도 윤석열 대통령과 기자시절 때부터 친분이 있는 박민이라는 문화일보 출신이 어느 날 갑자기 점령군처럼 낙하산을 타고 KBS에 '난입'했고 그가 사장실에 들어선 순간부터 9시 뉴스 앵커는 ‘순삭’됐고, ‘반골 기질’ 프로그램도 폐지됐으며, ‘좌파 성향’으로 의심받는 진행자 출연자들은 줄줄이 새 인물로 교체됐다.

보수층에서는 문재인 정권 때 임명된 KBS 사장의 영향력 때문에 뉴스도 ‘좌파 자판기’라는 비아냥을 할 정도로 KBS의 편향성에 대해 끊임없이 공격했다. 그러다 보수 세력이 집권하면서 이번에는 윤석열 대통령 입맛에 맞는 사람을 사장에 앉히고 대대적인 ‘복수전’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런 악순환이 그동안 KBS가 정권이 바뀜에 따라 사장도 교체되면서 언론의 중심을 잡지 못하고 정파성에 휘둘려온 것에 대한 자업자득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대에 역행하는 윤석열 정권의 KBS ‘침탈과 난입’이 정당화되는 건 아니다.

이 글에서 KBS의 정치적 편향성에 대한 시시비비를 가릴 수도 없고 그럴 능력도 없지만, 사장이 바뀌었다고 해서 매일 진행하던 앵커를 아무런 사전 정지작업도 없이 갑자기 쫓아내버린 것은 지나치다 못해 일종의 ‘국가 폭력’과 마주한 느낌이라 찜찜함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KBS뉴스의 정치적 경향성에 동의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이는 국민들이 KBS에 시청료를 강제로 내고 있기 때문에 단순한 ‘회사 차원’의 인사가 아니라 세금으로 운영되는 ‘공기관’의 일방적인 ‘횡포’에 대한 납세자의 당연한 분노다.

 

박민 신임 KBS 사장이 취임 다음날인 11월 14일 여의도 KBS아트홀에서 '대국민 사과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과문 발표에 앞서 신임 본부장 5명과 함께 박민 사장(왼쪽 세 번째)이 머리를 숙이고 있다. (사진=KBS 제공)


설마 시퍼런 대낮에 이렇게 노골적으로 KBS 간판을 바꿀 수 있을까 싶었지만 그건 기우였다. 박민 사장 취임 다음 날인 11월 14일 KBS뉴스는 윤석열 대통령을 선두에 내세우며 시작했다. 윤 대통령이 개인 투자자 손해를 막기 위해 공매도 금지가 불가피하다고 밝혔다는 내용이었다. 이밖에도 사장 교체 직후부터 정권에 비판적인 기사는 아예 없거나 뒤로 밀렸고 야당에 비판적인 기사가 앞부분에 배치되는 등 그야말로 며칠 사이에 뉴스의 논조가 완전히 달라진 걸 체감할 정도다.

그런데 KBS가 아무리 권력자 얼굴에 ‘분칠’을 세게 한다고 해서 그 이미지가 달라질 수 있을까. 국민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그 달라진, 앞으로도 엄청나게 많이 달라질, 대통령의 ‘성형’에 얼마나 또 매료될 수 있을까.

윤석열 정권이 들어서면서부터 우리 사회에 끼친 ‘해악’중에 가장 심각한 것은 ‘KBS 난입 사태’와 같이 위력으로 상대를 무조건 제압하려는 독단과 권위주의적 행태다. 적어도 시청료를 내는 국민들에게 최소한의 예의 정도는 보여주는 게 상식이지만 윤석열 대통령이 내리꽂은 사장은 사상 유례 없는 거칠고 무자비한 방식으로 KBS를 온통 '용산스럽게' 도배를 하고 있다. 


이런 '일방적 폭력'의 권한을 누가 주었는가. 박민 KBS 사장은 취임 하루 만에 대국민 기자회견을 열어 전 사장 시절 불공정 편파 보도로 공정성을 훼손하고 신뢰를 잃었다는 것에 대해 사과했다. 하지만 박민 사장의 그 ‘머리숙임’ 또한 국민에 대한 진심어린 사과가 아니라 윤석열 대통령이 집권 전후로 겪어야 했던 ‘가짜뉴스’의 마음고생에 대한 한 참모의 ‘노골적인 아부’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 기원전 6세기에 만들어진 인류 최초의 극장 디오니소스의 유적 전경. 지금은 훼손이 많이 진행되었으나, 석조 건축물이기 때문에 남아있는 부분도 많이 있다. 이 극장은 약 17000명을 수용할 수 있었는데 기원전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 인구가 약 15만명으로 추산되기 때문에, 당시로서는 도시인구의 1/10 수용이 가능한 어마어마한 수준이었다. 당시 그리스 권력자들은 이 극장을 프로파간다의 주요한 무대로 활용했다. (사진=나무위키)



언론의 본질적이고 가장 핵심적인 기능은 권력에 대한 감시와 비판, 견제다. 이 기능을 상실하면 그것은 언론이 아니라 정권의 나팔수에 불과할 뿐이다. 윤석열 정권이 KBS를 앞세워 관제 프로파간다로 국민들을 길들일 욕망에 사로잡혀 있지만 그런 속임수에 '혹' 해서 넘어갈 국민들은 많지 않다. 오히려 정권의 일방적인 프로파간다에 더욱 심한 거부감을 느끼며 KBS를 외면할 것이다. 

디오니소스 극장에서 고대 그리스 인들은 영웅들의 비극적인 서사를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권력에 감사함을 느꼈지만 결국은 그 체제에 길들여진 ‘관성’ 때문에 멸망하고 말았다. 고대 그리스가 멸망한 배경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새롭고 혁신적인 변화를 거부하고 ‘내 삶’에 만족하며 살아간 것도 그 중 하나다. 권력에 대한 비판과 견제를 통해 사회 혁신과 발전을 추동해내려는 의지들이 국가의 ‘비극 공연’에 의해 온순하게 길들여지다 보니 결국은 멸망의 문에 들어선 것이다.




고대 그리스 권력자들은 그래도 양심은 있었던지 노골적인 프로파간다를 보러온 아테네 시민들에게 돈이라도 주었지만, 지금 윤석열 정권은 KBS로 낯부끄러운 ‘권력찬양’을 하면서도 오히려 시청료를 강제징수하고 있다. KBS뉴스를 보는 사람들에게 돈은 못줄망정 그들의 객관성과 독립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것이 그나마 최소한의 권력 양심을 지키는 길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KBS를 통해 대한민국이 선진국에 진입해 얼마나 평온하고 살기 좋은 나라인지 국민들에게 끊임없이 주입시키고 안분지족을 느끼게 하려는 환상에 빠져 있는 것 같다. 그리스 사람들은 비극에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눈물을 쏟았지만, 21세기 대한민국 국민들은 지금 윤석열 대통령의 ‘희극’에 실소를 금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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