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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순 서울시장의 죽음이 한국 사회에 남긴 것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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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순 서울시장의 죽음이 한국 사회에 남긴 것

성기노피처링대표 2020. 7. 13.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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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추적추적 내립니다. 박원순 서울시장의 영결식이 2020년 7월 13일 아침 9시 30분 경 끝나고 그는 한번도 가지 않았던 길을 찾아 떠났습니다. 7월 9일 삶을 내려놓은 지 닷새만입니다. 서울 추모공원에서 화장을 하고 고향 경남 창녕 선영 부모님 묘에서 영면할 것입니다. 

박원순 시장의 죽음은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남겼습니다. 남은 자들이 떠안아야 할 책임이자 숙제이기도 합니다. 박원순 서울시장의 극단적 선택에 대해 대한민국은 두 갈래로 쪼개졌습니다. 

외신들의 첫 반응을 보겠습니다. 미국 CNN방송과 CNBC방송은 7월 11일 "대한민국이 박 원순시장의 죽음으로 인해 양분되고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갑작스러운 서울시장의 죽음은 개혁 성향의 정치인과 자칭 페미니스트로서의 경력을 쌓아온 남성에 대한 동정과 동시에 의문을 불러일으켰다고 방송은 전했습니다. CNBC는 "'한국 정치의 거물'이었던 박 시장은 사실상 대권후보였기에 그의 죽음은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줬다"고 했습니다. CNN방송도 "민주주의와 인권을 증진하는 참여연대 등 많은 단체를 설립했던 박 시장은 최초로 서울시장 3선에 성공하기도 했다"고 전했습니다. 

그의 죽음이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은 박 시장이 성추행 혐의를 받고 있는 와중에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의 장례를 서울특별시장(葬)으로 하는 것을 두고 ‘사회에 공헌한 삶을 애도하는 것’과 ‘부도덕한 죽음에 대해 세금을 쓸 수 없는 일’이라는 난제가 맞섰습니다. 대한민국은 조국 사태처럼 광화문과 서초동으로 또 다시 양분됐습니다. 미래통합당은 지도부 전체가 조문을 하지 않음으로써 박원순 시장의 조문은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선이 되어버렸습니다. 

박 시장의 영결식이 끝난 7월 13일 오전 9시 30분 기준으로 그의 서울특별시장(葬)을 반대하는 국민청원은 56만 9백명을 기록했습니다. 같은 시각 박원순 시장 온라인 분향소의 조문객은 1백 6만명을 넘어섰습니다. 언제까지 이렇게 숫자로 여론을 가르는 희한한 현상이 계속될지는 모르지만, 박 시장의 추모 열기는 그를 둘러싼 성추문 의혹에도 불구하고 뜨겁고 진지했습니다. 

오거돈 부산시장이 성추행 의혹으로 사퇴한 뒤 일어난 현상과는 판이합니다. 이는 박원순 시장의 지나온 길이 오 시장과는 달랐기 때문일 것입니다. 박 시장은 1998년 한국에서 성추행 혐의를 첫 번째로 승소로 이끄는 등 여성 인권의 대변자였습니다. 그런 여권수호의 선구자가 바로 자신이 그토록 지키려했던 여성의 인권에 발목이 잡혀 극단적 선택을 한 것이 너무도 아이러니컬 합니다. 또한 그의 추모열기만큼이나 박 시장의 성추행 의혹은 더욱 충격적이고 사후 후유증이 심각한 상황입니다. 

외신들은 한국 사회가 여전히 남성 중심주의라는 지적도 내놓고 있습니다. CNBC는 "한국에서 여권이 많이 개선됐지만 여성이 유명인사에 대한 의혹을 제기했다는 이유로 온라인 상에서 이 여성에 대한 공격과 반발이 잇따르고 있다"며 "한국 사회는 대체로 남성 중심 사회로 남아있다"고 지적했습니다. CNN은 "한국은 현재 여성혐오로 여겨지는 가부장적 성 문화에 대한 반발에 직면해 있다"며 "정치인들도 이러한 반발을 피하지 못하고 있다"고 꼬집었습니다. 방송은 대표적 사례로 안희정 전 충남지사와 오거돈 전 부산시장을 꼽았습니다. 이쯤되면 한 남성이 여성에게 우발적으로 성추행을 했다는 것이 아니라 힘을 가진 권력자가 위력으로 사회적 약자를 너무도 쉽게 성적으로 추행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자리 잡히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묻게 됩니다. 

박원순 시장의 죽음을 둘러싸고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너무도 많은 의견을 표출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것은 그가 우리 사회에 남긴 족적이 너무도 많기 때문일 것입니다. 박원순 시장은 지금 우리 시대를 이끄는 사람들이 으레 그렇듯 ‘자수성가’해서 서울시장까지 오른 성공의 아이콘이었습니다. 

그는 1955년 2월 11일 경상남도 창녕군 장마면 장가리에서 아버지 박길보와 어머니 노을석 사이에서 슬하 2남 5녀 중 여섯번째(차남)로 출생하였습니다. 형제관계만 봐도 그가 어렸을 때부터 얼마나 열심히 살았을지 짐작이 갑니다. 박 시장은 자서전에서 자신을 뒷바라지 하느라 많은 형제들이 희생을 해야 했다고 토로한 적이 있습니다. 

 

경기고듣하교 1학년 시절



오늘날의 나를 만든 많은 분이 계시지만 그 가운데 내 형제들을 잊을 수는 없겠습니다. 어린 시절 내 학비를 보태고 부모님을 돌보던 큰누님과 매형, 아들만 귀히 여기는 집안 분위기와 부모님의 인식 때문에 제대로 교육도 못 받고 외지에서 무진 고생만 한 둘째누님, 셋째누님, 시골에서 부모님 농사일을 돕느라 시집갈 때까지 온몸을 바쳐 일한 넷째누님, 학문의 길을 걷느라 어려우신 걸 뻔히 알면서도 제대로 도와드리지 못한 형님, 그리고 오빠들 때문에 중학교까지밖에 못 다니고 내내 농사일만 하던 막내 여동생. 오늘의 나를 만들어 준 희생과 헌신에 대해 아무것도 갚지 못하고 떠나는 마음이 아리기만 합니다. 

시골 창녕의 장가초등학교와 영산중학교를 졸업한 그는 1974년 당시의 최고 명문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됩니다.
 경기고등학교는 부잣집 아이들이 가는 엘리트 코스였기에 깡촌 출신인 그가 경기고를 졸업했다는 것은 어릴 때부터 남다른 열정과 야심이 있었음을 짐작케 합니다. 그리고 'KS코스'를 밟습니다. 그는 1975년 서울대학교 사회계열에 입학했습니다. 당시엔 서울대가 과별 모집이 아니라 큰 단위의 계열별로 모집해서 2학년 올라갈 때 과를 정하는 광역선발체제였습니다. 박원순이 입학한 사회계열엔 법학과, 사회대 학과들, 경영학과가 소속되어 있었고, 1학년 마친 뒤 이 학과들 중에 하나로 전공진입을 하게 되는 시스템이었습니다. 그가 사회학과나 법학과를 선택했음직 합니다. 

하지만 그는 서울대에 입학한 지 불과 3개월 만에 학내시위에 참여했다가 긴급조치 제9호 위반으로 학교에서 제명되고 4개월간 수감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가 시위 중 체포됐던 날은 저녁에 여대생들과 미팅 약속이 있었다는 뒷이야기도 유명합니다. 당시 박원순은 이화여대생들과 미팅을 앞두고 타임지로 공부하던 중이었는데 유신 반대 시위가 한창 열리는 것을 보고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해서 참여했다고 합니다. 간발의 차이로 청년 박원순의 운명은 달라졌습니다.

제적 후 5년여가 지나서 복학대상자로 지정되었지만, 그는 서울대에 복학하지는 않았습니다. 그의 남다른 자존심과 소신을 엿보게 합니다. 그는 제적 뒤 법원 고등고시에 합격해 22세에 강원도 정선 등기소장으로 부임합니다. 이후 단국대에 진학해 사법시험에 도전, 1980년 최종합격합니다.

여기에도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 유신체제하에서 정보기관은 이른바 운동권 출신 학생의 입학을 거부하라고 일종의 ‘지침’을 내리던 시절이라 대부분의 대학이 운동권 학생의 입학을 꺼렸음에도 불구하고 단국대에 입학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당시 장충식 총장의 영향이 컸습니다. 장충식 총장의 아들(현 장호성 단국대 총장)이 박원순과 경기고 동기동창 인연도 작용했다고 합니다. 

사법시험 합격 뒤 사법연수원(12기)에서 그는 자신의 인생을 바꿔줄 인물을 만나게 됩니다. 고 조영래 변호사입니다. 그는 사법시험 합격 후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도피생활을 하다 뒤늦게 연수원에 들어와 박원순의 동기가 됩니다. 박원순은 인생의 스승이자 존경하는 인물로 주저없이 조영래 변호사를 꼽습니다. 생전 "조영래 변호사가 살아있었다면 그분이 서울시장을 하고 나는 비서실장을 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도 그의 연수원 동기입니다. 

 

사법연수원 12기 수료식 때 문재인 대통령과 함께. 



첫 부임지는 대구지검이었는데 검사가 체질에 맞지 않았다고 합니다. 강압적인 조직문화와 사형집행 장면을 참관하지 못하겠다는 이유로 사표를 내고 결국 1년 만에 변호사로 개업하게 됩니다. 검사 시절 현재의 강난희 여사를 만나 결혼도 했습니다. 

박원순의 공적인 인생 경로는 검사 퇴임 뒤 변호사 시절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이때부터 ‘박원순=시민’으로 평가됩니다. 그는 한국 시민운동의 불모지를 개척했던 산 증인입니다. 뿔뿔이 흩어져 있던 시민의 힘을 조직화해내고 그것을 정치의 영역으로 확장시킨 최초의 인물입니다. ‘박원순=참여연대’로도 일컬어집니다. 그는 시민에게 참여라는 무기를 나누어주었습니다. 기득권의 철옹성이었던 정치의 영역에 시민들이 참여라는 무기를 가지고 그 성벽을 허물게 했습니다. 참여라는 말을 한국 사회에 처음 뿌리내리게 한 박원순의 공은 결코 적지 않습니다. 이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경제학자 우석훈은 평가로 그의 시민운동 시절 평가를 갈음해볼까 합니다. 2011년 9월 19일 경향신문에 ‘우석훈의 시민운동 몇 어찌’(28) 코너에 “박원순과 참여연대, 그리고 출마”라는 제목으로 실린 칼럼 내용 중 일부입니다. 


2006년 지방선거 몇 년 전에 시민단체 내에서 서울시민포럼이라는 단체를 결성해서 서울의 지자체 선거를 준비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 우리가 염두에 두었던 것은 박원순 대표였는데, 그가 출마하는 데까지 이끌어내지는 못했다. (중략)

환경운동연합이 지자체와 여러 가지 양상으로 협조도 하고 갈등도 빚게 되는 반면, 참여연대는 ‘어드보카시’라고 부르는 일종의 대변인 운동으로서, 중앙정부 및 국회와 더 많은 일을 했다.

박원순이라는 이름은, 참여연대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넓게 보면 한국 시민단체의 상징 중의 상징이기도 하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IMF 직후에 참여사회연구소 연구위원으로 참여할 때의 일이다. 우리는 그를 ‘박변’이라고 불렀고, 우리가 하고 싶던 얘기를 그를 통해서 중앙정치에 전달하고는 했다. 그는 지도자라기보다는 ‘우리의 입’ 같은 존재에 더 비슷했다.

활동가들은 최열 대표나 박변이 하는 얘기를 그냥 듣고 따르는 그런 관계라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의 힘을 활용한 그런 관계에 가깝다. 그건 행정의 장관과 국장 혹은 사무관 관계 아니면 재벌의 CEO와 실무자 간의 관계와는 확실히 다르다.

 

2018년 6월 서울시장 3선 연임에 성공하며 강난희 여사와 함께. 


박원순의 시간을 크게 3가지로 나누면, 참여연대 사무총장 시절, 아름다운가게를 넓혀 나가는 아름다운재단 시절 그리고 가장 최근의 희망제작소 시절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단체 활동가에서 재단 이사장 그리고 연구소 소장의 3단계를 밟아왔다고 할 수 있는데, 이 각각의 기관은 박원순이라는 상징성만 교류하지, 운영이나 결정에 서로 관여하는 일은 거의 없다. 삼성이나 현대 같은 곳들이 오너의 지분을 통해 지배한다면, 위의 세 단체는 박원순이라는 상징성을 통해서 오히려 박원순을 지배하는 관계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형식적으로만 보면 성공의 연속이지만, 이 과정이 꼭 그렇게 부드러웠던 것만은 아니다. 참여연대 시절에는 각종 연대 사업에서 성공의 열매를 전부 가져갔다는 투덜거림이 있었고, 아름다운가게는 이미 활동하던 지역의 단체들에 백화점식으로 군림한다는 비판이 있었다. 희망제작소는 워낙 경제적으로 운영이 어렵다보니, 연구원과의 내부 갈등이 적지 않게 있었다. 그래도 “이건 박변이 하는 일이니”, 그렇게 서로 조정하고 문제점들을 풀면서 지금까지 왔다.

초창기의 참여연대가 하던 일들도 경제민주화 등 몇 개의 단체들이 분화하면서 지금은 많이 분산화된 상태이다. 한때는 참여연대 활동가를 뽑을 때 논술시험까지 보게 되는 등 청춘들의 선망의 직장이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보다는 많이 약해진 상태이다.

그렇지만 참여연대가 한 가지 잘한 건, 다른 시민단체에 비해서 정부의 지원에 의존하지 않겠다는 원칙을 세웠고, 그걸 지켜나갔다는 점이다. 이명박 정부 이후, 많은 시민단체들이 돈줄이 말랐다고 할 정도로 혹독한 시기를 버텼지만, 상대적으로 참여연대는 덜 고통을 받았다. 받던 게 없으니, 끊길 것도 없는 상황이다.

국가를 잘 운영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대통령 후보를 배출하고 대선 과정을 실무적으로 꾸려갈 수 있는 정당이 아닌 종합 조직이 한국에는 몇 개가 있다. 몇 개의 재벌이 그렇고, 교수와 졸업생들로 구성된 대학 조직이 그렇다. 서울대 법대나 경기고 같은 데가 이런 비정당 조직이다.

노조는 규모는 크지만 노동문제 그것도 정규직 노동문제에 집중하다 보니, 그런 종합능력은 없고, 농민들의 조직인 전농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이 정치운동의 창구로 진보정당 운동을 만들었지만, 생각보다 내부 역량 축적의 속도가 늦다. 참여연대와 환경운동연합 그리고 여성운동의 경우는 깊이는 깊지 않을지라도 21세기에 그런 종합적 능력을 새로 갖춘 조직들이다.

 

고 박원순(맨 왼쪽) 서울시장이 참여연대 사무처장으로 활동했던 1998년 9월 7일 서울 종로구 안국빌딩에서 열린 '국가 개혁을 위한 시민행동계획' 발표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옆으로는 박 시장과 당시 함께 활동했던 장하성 주중 대사와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의 모습이 보인다. 



박원순의 서울시장 출마는, 시민운동의 정치참여라는 새로운 시도이며 시민운동의 출마 자체라고도 할 수 있다. 그게 ‘박변’이라는 존재가 가지고 있던 위상이다. 안철수 원장은, 그를 지지하는 튼튼한 계층이나 세력은 있지만 그 힘을 물리화시킬 수 있는 집단이 아직 없다. 박원순은 대중적 인기는 약하지만 국정 아니면 시정 같은 것을 수행할 집단의 뒷받침이 있다.

우석훈은 박원순이 조직화해낸 참여연대는 비정당조직으로 대선을 치를 만한 역량과 힘이 있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런 박원순은 정치권의 수많은 콜을 받았지만 거절했고 시민운동에 헌신했습니다. 그것이 박원순이 가진 힘이었습니다. 하지만 박원순의 비극은 자신이 그토록 참여하기를 주저했던 정치의 영역에 발을 담금으로써 시작됩니다(박원순 시장의 장녀 박다인씨(37)씨는 부친 영결식에서 “시민이라는 말이 생소하던 당시 시민운동가였던 아버지는 그렇게 피하고 피하던 정치에 몸담게 됐다. 아버지는 시민의 이름으로, 시민의 힘으로 서울시장이 됐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시민운동의 힘은 자본으로부터 독립돼 정치권력을 견제하는 순수성과 헌신, 희생에서 나옵니다. 박원순은 시민운동을 정치영역에 대등하게 맞서는 정도로까지 그 역량을 끌어올렸지만 결코 정치권을 기웃거리지는 않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한국 시민운동의 수준을 한단계 끌어올린 주 원동력이었습니다. 

하지만 박원순은 결국 서울시장 선거에 도전하게 됩니다. 왜 박원순은 서울시장직에 도전했던 것일까요? 지금까지 이뤄낸 시민운동의 업적도 결국 정치로 가는 징검다리였다는 것일까요? 아니면 또 다른 사정이 있었던 것일까요? 

이에 대해 박원순은 직접 설명을 한 바가 있습니다. 그는 시민 활동가로 삶을 마감하려던 계획을 바꿔 정치권에 뛰어든 배경으로 “이명박 정부의 탄압”을 지목했습니다. 박원순은 2011년 10·26 보궐선거 직전 49일 동안 떠난 백두대간 종주를 기록한 책 <희망을 걷다>를 2013년 1월 펴냈습니다. 여기에서 그가 밝힌 심경의 일단을 들어봅니다. 

“이명박 정부 들어 생각에 동요가 일기 시작했다. 하는 일은 물론 계획하는 일까지 사사건건 방해를 했다. 나와 관계있는 기업인들이 조사를 받았고, 내가 출연하는 프로그램이나 나에 대한 내용이 실린 기사를 간섭하는가 하면 강의를 가는 곳마다 정보과 형사들이 나타났다. 나만의 문제라면 참아 넘길 수 있었지만 세상은 거꾸로 돌아가고 있었다.”

박원순은 희망제작소 상임이사 시절인 2009년, 국가정보원이 희망제작소와 자신을 후원하던 민간 기업인 등을 사찰했다는 의혹을 제기한 바 있습니다. 그는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무상급식 반대 주민투표 무산으로 시장직에서 물러난 지 이틀째 되던 2011년 8월28일, “더는 고통받는 대중의 삶을, 퇴행하는 시대를 그대로 두지 말라는 내면의 소리를 거부할 수 없었다”며 출마 결심을 굳혔다고 밝혔습니다. 2011년 7월19일 지리산에서 시작한 백두대간 종주 41일째 날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잠시 노무현과 박원순의 죽음에 떠오르는 인물이 있습니다. 이명박입니다. 박원순 죽음의 연원을 따져 올라가면 '이명박의 나비효과'와 마주하게 됩니다. 물론 보수층에서는 “노무현이나 박원순이나 부끄러워서 죽음을 택한 것이다”라고 주장합니다(경희대 이경전 교수). 노무현의 죽음은 보다 직접적인 검찰수사가 그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박원순에게도 비슷한 경우라고 주장하기에 부족한 점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명박의 적대적인 대결 정치 전략이 없었다면 노무현 박원순의 죽음도 또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을 수 있습니다.

 

시민단체의 리더까지도 정치에 뛰어들게 한 장본인이 이명박이었습니다. 사찰과 치졸한 견제로 시민단체의 싹을 자르려는 불순한 의도를 묵과할 수 없었던 박원순은 결국 정치의 진흙탕 속으로 빨려들어가게 됩니다. 이명박 권력은 시민운동이 순수성을 유지할 수 없게, 질식하도록 그들을 탄압하고 억눌렀습니다. 이것이 박원순 정치참여의 정당화가 될 수는 없지만, 사회의 고유한 영역들을 권위적이고 억압적인 통치로 뒤흔든 이명박 정권의 책임 또한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권력의 반목과 복수의 서막을 열었던 이명박의 정치행태는 우리가 반드시 되짚어봐야할 숙제로 남아 있습니다. 

 

어찌됐든 박원순은 서울시장직에 도전하게 됩니다. 박원순은 결심을 굳힌 뒤 산중에서 안철수 당시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에게 보낸 전자우편에서 “어쩔 수 없는 운명의 힘으로 선거에 나가게 됐다. 안 교수님이나 저나 냉혹하고 객관적 평가를 우리 스스로 내려야 할 시점”이라며 단일화를 촉구했습니다. 그리고 하산 다음날인 2011년 9월6일 안철수 원장과 만나 단일화에 합의한 뒤 역대 첫 무소속 후보로 서울시장에 당선됐습니다.

이때도 운이 많이 따랐습니다. 시민운동가 출신으로 대중적인 인지도(지지율 5%)가 많이 낮았습니다. 본인 스스로도 당시의 지지율에 당황스러웠다고 평했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사실 딱 그 정도의 인지도였습니다. 당시 서울시장 지지율은 떠오르는 샛별 안철수 교수가 독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안철수는 출마포기와 함께 박원순을 지지 선언했습니다. 당시 안철수 원장의 측근으로 통하던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의 말에 의하면, 서울시장에 나가는 것을 안철수 후보의 아버지가 반대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양보하는 것처럼 포장이라도 하자고 해서 안철수 후보의 동의 아래 진행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아름다운 단일화'의 한 사례로 손꼽히면서 박원순의 3선 기틀을 닦게해주는 첫 길이 되었습니다. 

그 이후는 우리도 잘 아는 사실입니다. 서울시장직에 재임하면서 박원순은 많은 일을 해냈습니다. 박원순 시장은 반값등록금부터 무상급식, 사회복지 대폭 확대, 임대주택 공급 확대, 도시재생정책 추진, 노동이사제 등 굵직한 정책들을 다방면으로 추진했습니다. 특히 서민 주거와 청년문제에 천착해 관련 예산을 대폭 증액하고 지원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최근에는 전국민 고용보험제도와 강남.북 불균형 해소를 위한 법 개정도 활발하게 추진하고 있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대권주자 지지율이 좀처럼 오르지 않아 노심초사했던 흔적이 많이 드러나지만, 서울시민 특히 서민들과 사회적 약자를 위한 박원순의 시정은 ‘조용한 혁명’으로도 불릴 만합니다. 한국 정치에서 그만한 문제의식과 책임감을 가진 서민의 대변자는 없었을 것입니다. 앞으로 쉽게 나타날지도 의문입니다. 

박원순 시장의 극단적 선택을 접하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앞부분에 그의 행적과 이력을 길게 서술한 것은 그가 한국 정치에 남긴 발자취와 헌신을 기억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그가 가진 ‘과’를 덮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박원순이 한국사회에 기여한 공로가 크다고 하더라도 그가 단 한 사람에게라도 엄청난 고통과 피해를 끼쳤다면(이 부분은 앞으로 반드시 그 진실이 드러나야 한다고 봅니다), 그것에 대한 책임 또한 결코 가볍지 않다고 봅니다. 이것이 박원순의 삶을 관통했던 약자에 대한 배려이자 지식인의 책무이기 때문입니다. 

박원순은 우리들에게 너무도 많은 말들을 남겼습니다. 그는 시민운동을 이끈 선구자였고 그것을 조직화해낸 지도자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말과 행동에는 책임도 따른다고 봅니다. 박원순이 대중들에게 던졌던 메시지 중 하나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그의 죽음으로 인해 양분된 대한민국의 갈등에 대해 박원순은 이미 답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2016년 8월 28일 오후 2시 서울 마포구 가톨릭 청년회관 5층에서 박원순 서울시장의 ‘세기의 재판’ 출판기념 북토크가 열렸습니다. ‘세기의 재판’은 박원순 시장이 17년전에 펴낸 ‘내 목은 매우 짧으니 조심해서 자르게’의 개정판입니다. 박 시장은 휴일에도 홀을 가득 메운 청중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등장했습니다. 그는 ‘깨어있는 시민들’에게 감사의 말을 잊지 않았습니다. 오늘의 그를 있게 했던 서울대 우 조교 사건을 언급했던 문답과 현대판 잔다르크 사건에 관한 문답을 소개하는 것으로 글을 맺으려 합니다. 

 

2016년 8월 28일 박원순 서울시장은 자신의 책 '세기의 재판' 출판기념 북토크에 출연해 '진실을 드러내는 게 우리의 책무'라고 말했다. 그가 그토록 찾으려고 했던 진실을, 이제 우리는 그의 죽음과 함께 다시 마주하고 있다. 


유정아(당시 사회자): 객석에서 질문이 들어왔는데요. 시장님의 역사 속에서의 가장 기억에 남는 재판은 무엇인가요?

박원순: 전선에 섰던 전사들을 변론해주는 역할을 했어요. 하나같이 다 그 시대에 중요한 역할을 했죠. 많은 재판이 있었지만, 저한테 가장 의미 있는 재판은 '서울대 우 조교 사건'입니다. 서울대 우 조교 사건을 보면서 간단한 사건이 아님을 인식했어요. 직장에서 여성이 차 심부름하고, 술자리에서 접대시키는 경향이 있었죠. 술 심부름에 포옹은 허다했고요. 이 재판은 우리 시대에 양성평등을 바로잡을 기회였다고 봐요. 우 조교는 훌륭한 친구예요. 1심에서 이겼고, 2심에서는 진 상황에서 결혼을 앞두고 있었죠. 그녀가 소송을 취하하고 말았으면 성희롱 사건은 영원히 묻혔을 겁니다. 결혼에 대한 압박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대법원을 가서 승소했어요. 덕분에 고용평등법이 바뀌고, 성희롱 처벌이 강화됐어요. 우 조교의 불굴의 의지 덕에 법제화가 이뤄졌죠. 역사의 큰 물줄기를 바꾸는 가운데에는 한 사건이 있었고 한 사람이 있었어요. 그것이 우 조교입니다. 남녀평등 문제에서 우뚝 서 있는 사건이 될 거예요. 우 조교는 제가 평생 책임져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물론 스스로도 지금 잘 살고 있지만요.

유정아: 당시에 잔다르크도 마녀취급을 받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역사가 바뀌고, 바로 잡혔죠. 그렇다면 잔다르크의 현대판을 살아가는 이들은 얼마간의 시간이 흘러야 인정을 받을 수 있을까요. 그 시간을 줄일 수는 없을까요?

박원순: 프랑스에서 유대인 드레퓌스의 간첩 혐의를 둘러싸고 일어난 '드레퓌스 사건'에서 무죄를 확신하고 재심을 주장했던 사람이 여럿 있었는데요. 이분들이 그 당시에 했던 말은 '진실은 지하에 매장할수록 폭발력을 가진다'였어요. 흔히 사필귀정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진실은 드러나는 법이죠. 다만 그 진실을 드러내는ᅠ것이 우리의 책무입니다.

지금도 생각해보시면 21세기 사법부가 진실을 제대로 밝히고, 정의의 편을 들고 있는지를 생각하면 마냥 낙관하고 볼 순 없는 일이에요. 얼마 전 진 아무개 검사장을 보세요. 몇억을 받고 변론계도 안내고 로비가 있었다는 것 아닙니까.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으로 알려진 강기훈 유서 사건 때도 그렇고 최근 10~20년 사이에도 진실을 어둠 속에 묻어두고, 허위를 진실처럼 행사한 사건들이 여럿 있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올바른 사법부와 검찰을 가지지 못했어요. 이 시대를 살아가는 동시대인들의 책임도 적지 않아요. 최근 국정원이 '박원순 제압문건'을 만들어서 말하자면 특정단체의 댓글 공작을 통해 저를 제압하려는 움직임이 확인됐어요. 그런다고 제가 제압될 사람은 아니지만, 어떻게 21세기에 이런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저는 이 책이 꼭 지나간 역사의 뒤안길에만 존재하는 책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함께 경각심을 갖고 생각하고 실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되짚어주는 책이기도 합니다.

이 기사의 당시 제목은 “박원순 시장 ‘진실을 숨기지 않는 게 우리의 책무’”였습니다. 그가 그토록 찾으려고 했던 진실을, 이제 우리는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함께 다시 마주하고 있습니다.

 

불편한 진실을 마주할 용기가 역사의 진보를 이끌어가는 최후의 동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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