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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대통령, 오는 대통령

성기노피처링대표 2022. 5. 3.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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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연합뉴스)


5월 9일 자정이 되면 문재인 대통령이 떠나고, 윤석열 당선인이 옵니다. 지난 3월 9일 치른 대선 이후 2달 만에 비로소 정권교체가 이뤄집니다. 역대 정권교체 인수인계 중에서 이번 문재인-윤석열 ‘교대’만큼 시간이 길게 느껴진 적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신구 정권은 인수위 출범 직후부터 청와대 이전으로 서로 낯을 붉혔고, 한국은행 총재 인사 갈등과 이명박 전 대통령 사면 요구 논란 등 문제가 될 만한 사안에 대해 양측 모두 양보 없이 볼썽사나운 ‘드잡이질’을 벌였습니다. 정권교체기에 보여주고 있는 신구권력의 낯 뜨거운 싸움질은 최소한의 정치 품격을 기대하는 국민들에게 절망감을 안겨줍니다. 

정치학자 새뮤얼 헌팅턴은 ‘민주주의의 공고화’에 대해 두 번의 ‘정권 교체 테스트’라는 기준을 제시한 바 있습니다. 민주주의적 정부가 두 번 정권교체 될 때 그 민주주의가 성숙해졌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실체적 집권세력이 모두 바뀌는 ‘수평적 정권교체’가 민주적이고 평화적인 방식으로 이뤄지는 것은 한 나라의 민주주의 성숙도를 가늠하는 척도입니다. 이런 점에서 노태우 정권 이후 지금까지 4번의 정권교체(정당 기준)를 이룬 한국은 헌팅턴의 기준에서 보면 이미 정치 선진국인 셈입니다. 그런데 지난 3월 9일 대선 이후 지금까지 노정된 신구권력의 갈등과 충돌을 보면 과연 한국에서 수평적 정권교체가 제대로 이뤄지고 있는지 회의가 들 때가 많습니다. 총칼만 들지 않았을 뿐, 양측의 ‘무력충돌’은 곳곳에서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한국은 여전히 심리적인 내전이 계속되는 정치적 분쟁지역으로 남아 있는지도 모릅니다. 

최근 문재인 대통령은 JTBC ‘대담-문재인의 5년’ 프로그램에 출연해 재임 5년간의 소회를 밝혔습니다. 이 인터뷰를 두고 정치권에서는 “다분히 정치적 의도를 가진 청와대 정무라인의 ‘스핀닥터링’이다”는 해석이 나왔습니다. 퇴임 직전 역대 대통령 지지율 1위(40% 상회)를 기록한 문 대통령이 ‘윤 당선인과 비교해도 꿀릴 게 없으니 할 말은 다 하고 가겠다’는 의중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는 것입니다. 문 대통령의 ‘워딩’은 평소답지 않게 직설적이었고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평소 애매모호한 화법을 구사한다는 비판을 의식했다기보다 퇴임하는 마당에 보수진영의 ‘다음 공격’을 대비해 확실히 자신의 방어막을 구축해 놓겠다는 의지도 엿보였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왼쪽)이 지난 4월 15일 청와대 상춘재에서 손석희 전 JTBC 앵커와 특별 대담을 하고 있다. 이 자리에서 문 대통령은 윤석열 당선인의 청와대 국방부 청사 이전에 대해 “개인적으로 저는 별로 마땅치 않게 생각한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사진=청와대)



특히 문 대통령은 청와대 국방부 청사 이전에 대해 “개인적으로 저는 별로 마땅치 않게 생각한다”고 윤 당선인에게 직격탄을 날렸습니다. 문 대통령은 청와대 국민청원 답변에서도 “국가의 백년대계를 토론 없이 밀어붙이면서 소통을 위한 것이라고 하니 무척 모순적”이라고 비판 수위를 끌어 올렸습니다. 문 대통령 입장에서 후임자의 미숙한 일 처리를 꼬집어 역사적 기록으로 남기려는 욕심일 수도 있고, 퇴임 이후 자신에게로 향할 ‘칼날’에 대해 ‘호락호락 당하지 않겠다’는 경고성 발언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새 정권이 추구하는 국가비전이나 색깔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비판을 듣는 윤 당선인 입장에서 볼 때 전임자의 쓴소리는 상당히 뼈아팠을 것입니다. ‘권위주의 종식’으로 대변되는 청와대 이전을 ‘윤석열 정권’의 주요 비전으로 밀어붙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문 대통령은 윤 당선인이 가장 아파할 만한 ‘메인 타깃’을 원점 타격한 것입니다. 언론도 당연히 ‘신구권력 갈등 재현’이라는 헤드라인을 뽑았고 양측은 5월 9일 자정 임무교대 전까지 불편한 상태에서 배턴터치를 하게 됐습니다. 역대 대선 사상 초박빙(0.73%)의 승부가 낳은 후유증이라고 받아들이기에는 한국 정치의 구조적 문제점이 이번에도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는 대통령’도 ‘가는 대통령’을 제대로 예우했는지 의구심이 듭니다. 문 대통령의 공식 임기는 5월 9일 자정까지입니다. 하지만 문 대통령은 5월 9일 18시 ‘조기 퇴근’을 할 예정입니다. 6시간 정도의 국정 공백이 우려되기도 합니다. 문 대통령은 이에 대해 “마지막 날 밤을 청와대에서 보내지 않는 것이 전혀 불편하지 않다. 그날 자정까지는 우리 정부의 책임이기 때문에 청와대 당직이 근무하면 되고 저는 업무 연락망을 잘 유지하면 된다”고 설명했습니다. 역대 대통령들은 관례상 임기 마지막 날 밤을 청와대에서 보낸 뒤 다음날 당선인 취임식에 갔습니다. 

 

지난 4월 26일 오후 서울 용산구 국방부 청사 본관에서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 취임 후 사용할 집무실 준비를 위한 공사가 진행 중이다. (사진=연합뉴스)



하지만 문 대통령은 ‘내쫓기듯’ 서둘러 청와대에서 짐을 싸야 합니다. 윤석열 당선인이 5월 10일부터 청와대를 국민들에게 공개한다고 선언했기 때문입니다. 문 대통령은 할 수 없이 ‘일찍’ 집을 비워주게 됐습니다. 그 영향으로 6시간 동안 청와대는 문 대통령과 비상연락체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이렇게까지 급하게 청와대를 비워야 하는 이유를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전임자 입장에서 다분히 감정적인 앙금이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윤 당선인이 일방적으로 청와대 이전을 추진하면서 신구권력 갈등이 폭발했는데, 끝내 양측이 ‘지혜로운 해법’을 찾지 못한 채 정권교체 최악의 오점으로 남게 됐습니다. 김건희 여사의 청와대 사저 ‘쇼핑’ 논란도 ‘가는 대통령’을 세심하게 배려하지 못한 신구 권력교체의 추한 한 장면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미국은 물러가는 대통령이 당적을 초월해 자신의 배턴을 이은 후임자에게 성공을 바라는 덕담과 당부의 글을 백악관 집무실의 ‘결단의 책상’(대통령 전용 책상) 서랍에 친필로 남기고 떠나는 것이 오랜 관행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2020년 대선 직후 미국 정치권에서는 한국의 ‘문재인-윤석열’ 사이만큼 좋지 않았던 트럼프 대통령이 바이든 당선인에게 ‘손 편지’를 남길 것인지 큰 관심이 쏠렸습니다. 일각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바이든 당선인의 승리를 부정하며 오랜 백악관의 전통마저 깰 것이라고 예견했습니다. 하지만 그 예상은 빗나갔습니다. 전임자가 후임자에게 격려와 당부를 담은 편지를 남기는 전통만큼은 지켰습니다.


 

사실 2020년 대선 이후 일어난 트럼프-바이든 정권교체 과정은 근래 미국 역사에서 최악이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선거 결과에 승복하지 않았고 바이든 당선을 선언하는 연방의회 회의를 방해하기 위해 지지자들로 하여금 의사당 난입을 부추겼고, 바이든 대통령 취임식에도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미국 정치도 혼란한 정권교체기에 전임자와 후임자 간의 불화와 반목이 적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1952년 민주당의 트루먼 대통령이 공화당의 아이젠하워 당선인에게 정권을 이양하며 양측이 회동한 것을 기점으로 점차 정권교체기의 갈등은 줄어들었습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근래 보기 드문 대선 불복의 오점을 남겼지만 그 와중에도 ‘손 편지’ 하나는 남겼습니다. 

현재권력과 미래권력은 그 자체로 단 1초도 양립할 수 없는 상극의 관계입니다. 미래권력이 선출되면 현재권력의 숨소리 하나, 물음표 하나에도 미래권력은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습니다. 전임자의 실정으로 탄생한 정권은 그 ‘실책’을 자양분으로 정권을 출발시키려 합니다. 전임자 입장에서 억울할 수도 있겠지만 후임자의 권력 이양 첫 출발은 전임자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습니다. 미국은 신구권력 교체의 갈등을 ‘손 편지’를 통해 조용히 봉합해나가는 전통 하나만은 지키고 있습니다. 현재권력과 미래권력은 그렇게 굿바이를 외치며 소리 없는 ‘정산’을 합니다. 

한국 정치는 ‘할 말은 하고 가겠다’는 현재권력과 ‘그 말에 책임지라’며 발끈하는 미래권력의 적나라한 ‘멱살잡이’ 장면이 국민들을 불편하게 합니다. 우리는 언제쯤 ‘가는 대통령’이 ‘오는 대통령’에게 따뜻한 마음의 편지 한통을 보냈다는 미담을 들을 수 있을까요.  

 

(여성경제신문 5월 3일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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