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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기노의 정치 피처링
[성기노 칼럼] 윤석열의 KBS 대담, ‘김건희 명품백 분노’ 잠재울까 본문
윤석열 대통령의 정치 지도력은 ‘보스 리더십’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호탕한 성격에 화려한 언변으로 어딜 가든 좌중을 압도하며 주목을 받습니다. 참모들을 일단 임명하면 웬만해선 교체하지 않고 밀어줍니다. ‘책임은 내가 질 테니 두려워하지 말고 소신껏 일하라’고 독려합니다. 아랫사람 입장에서는 신이 나서 일할 법도 합니다.
지난 2022년 4월 윤 대통령은 당선인 시절에 한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 “옛날에 트루먼 대통령이 자기 책상에 써놓은 팻말이 ‘The Buck Stops Here’였다. 모든 책임은 여기서 끝난다, 모든 책임은 나한테 귀속된다는 뜻”이라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윤 대통령이 이 ‘경구’를 굳이 인용한 것은 바로 자신이 앞으로 책임감 강한 지도자로 남고 싶다는 대 국민 약속이자 일종의 ‘자기 주문’이었을 것으로 믿습니다. 그 후에도 윤 대통령은 기회가 날 때마다 “참모 뒤에 숨지 않고 정부의 잘못은 솔직히 고백하겠다”고 다짐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윤 대통령이 집권하고 2년이 지나가면서 ‘윤석열’이라는 한 국정 최고 지도자의 ‘실체’를 접하게 되면서 당혹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먼저 윤 대통령이 지도자로서 가장 기본적으로 해야 할 책임과 의무를 방기하고 모른 척 넘어가며 자기편의적으로 행동하는 경우가 너무도 많습니다.
윤 대통령은 올해에도 결국 대통령실 출입기자들을 상대로 한 생중계 형식의 신년 기자회견은 어물쩍 생략했습니다. 대신 지난해 말 낙하산 논란이 일었던 김민 사장 체제의 KBS와 단독 대담 형식으로 현안에 대한 입장을 밝힐 예정입니다. 그나마 KBS 대담도 생중계가 아니라 2월 4일 사전 녹화하고 사흘 뒤인 7일 저녁에 방송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3일간의 ‘시차’를 둔 것은 미리 대담 형식과 내용을 조율하고 대통령실 참모들과 똑똑한 KBS 수뇌부가 자신들의 입맛대로 마음껏 ‘편집’할 시간까지 주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동안 말도 많았고 탈도 많았던 대통령 신년 기자회견은 생중계 기자회견, 기자단과의 ‘김치찌개 간담회’ 등이 검토됐지만 이 경우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기가 쉽지 않은 점이 고려돼 결국은 대통령과 KBS의 노골적인 ‘프로파간다 약속 대련’으로 귀결된 것입니다.
윤 대통령은 한때 역대 정권 가운데 가장 ‘기자 친화적’인 대통령으로 자리매김 됐습니다. 그는 1년이 지나도 대통령 얼굴 한번 보기 힘든 출입기자들이 거의 날마다 대통령을 직접 만나 현안 질문을 하는 ‘도어스테핑’을 했던 유일한 대통령입니다. 윤 대통령은 지난 2022년 5월 11일부터 11월 18일까지 6개월간 총 61회에 걸쳐 기자단과 용산 대통령실 출근길에서 만났습니다.
하지만 대통령의 이런 호기로운 ‘도전’과는 달리 각본 없이 진행된 문답에서 실언 논란이 종종 발생했고 참모들은 대통령의 ‘충동적’인 답변에 놀란 가슴을 쓸어내려야 하는 날들이 많아졌습니다. 결국 MBC ‘바이든-날리면 사태’가 터졌고 그 이유로 헌정사에 기록될 만한 대통령과 국민들 간의 ‘소통 티키타카’도 불미스럽게 막을 내리고 말았습니다.
윤 대통령이 자신을 가혹할 정도로 ‘편파적이고 미운’ 태도로 대하는 언론에 실망을 느끼며 화를 삼켰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럼에도 언론과의 ‘동행’은 대통령 기분에 따라 멀리했다 가까이 했다 하는 사적인 관계가 아닙니다. 국정 최고 지도자로서 국민들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매개체가 바로 ‘언론’입니다. 대통령은 국민들에게 그간의 국정 상황과 민생 이슈들을 자세하게 설명할 의무와 책임이 있습니다.
하지만 윤 대통령은 지난 2022년 8월 취임 100일 회견 이후 18개월째 방송 회견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기자들과의 공개 문답도 2022년 11월 도어스테핑 중단 이후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지난해 5월 취임 1주년 때도 공개 기자회견은 생략됐습니다. 박근혜-문재인 전 대통령이 ‘불통정권’으로 낙인찍혔어도 지금의 윤 대통령처럼 언론과 완전히 담을 쌓고 지내지는 않았습니다. 지금 윤 대통령은 국민이 궁금해 하는 것에 답하기보다 참모들이 연출한 ‘민생 쇼’의 한 출연자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아마도 윤 대통령이 이번 신년 기자회견의 형식과 내용에 대해 오랫동안 고민을 했던 것은 바로 김건희 여사 명품백 수수 의혹 관련 이슈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최고 권력자가 아닌 그 배우자의 ‘위헌적 권력개입’이나 ‘국정농단’ 의혹은 지금 국민들이 가장 궁금해 하는 것입니다. 대통령이 이를 모른 척하고 넘어갈 수 없기 때문에 신년 기자회견 생방송을 한다면 기자들의 불편한 질문과 대통령의 어색한 답변이 국정 최고 지도자의 이미지를 훼손시킬 우려가 제기됐을 것입니다.
하지만 역대 대통령 가운데 김영삼 전 대통령은 아들 현철 씨 국정개입과 관련해 그를 구속시키는 결정과 함께 대 국민 사과를 했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아들 홍업 홍걸 씨의 구속 사태와 관련해 공식 사과를 했습니다. 물론 윤 대통령 입장에서 볼 때 김건희 여사 명품 백 수수 의혹 건은 ‘아버지의 지인’임을 내세운 불법적 ‘몰카 공작’이 억울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공개된 일부 동영상을 보면 김 여사가 ‘국정개입’ 의혹을 불러일으킬 만한 결정적 장면들도 있습니다. 국민들로서는 당연히 ‘비 헌법적 기관’에 의한 불법적인 국정개입 의혹을 캐 물을 권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윤 대통령은 김건희 여사 사건을 한 개인의 억울한 몰카 희생양으로만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국민들이 가리키는 손가락은 몰카 공작이 아니라 김건희 여사의 국정개입 의혹입니다.
이미 상황은 김 여사의 몰카 공작에 대한 윤 대통령의 진솔하고 상세한 ‘해명’으로 넘어갈 수준을 넘어섰습니다. ‘김건희 여사 특검법’이 국회에 상정돼 있고 민심은 명품 백 수수 의혹에 대해 분노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윤 대통령이 KBS와의 ‘약속 대련’으로 백번 해명하고 억울함을 호소해 본들 이는 기름바다에 불을 던지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대통령의 그 어떤 해명도 국민들의 무너진 ‘감정선’을 다독일 수 없습니다. 공정과 정의의 상징인 국가 최고 지도자와 그 가족의 불공정과 불의는 민심을 들불처럼 일어나게 만들 뿐입니다.
한편 윤 대통령은 이번 설 명절 인사에서 김 여사와 출연했던 것과 달리 대통령실 직원들과 함께 가수 변진섭의 ‘우리의 사랑이 필요한 거죠’를 부르는 형식으로 대체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대통령이 중간에 대국민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의 설 인사 영상 촬영까지 마친 것으로 알려집니다. 이는 또 무슨 생뚱맞은 노래 타령인지 모르겠습니다. 윤 대통령이 미국 국빈 방문 때 ‘아메리칸 파이’로 미국인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특장점’을 이번에도 한번 살려보자는 대통령실 참모가 있었다면 당장 그를 잘라야 합니다.
윤 대통령이 즉흥적으로 낸 아이디어라고 한다면 이는 그간 쌓아온 ‘국정 프로토콜’이 대통령 한마디에 순식간에 무너지는 어처구니없는 ‘일탈’입니다. 김 여사를 명품 백 수수 의혹 때문에 도저히 명절 인사에 내세우지 못한다면 대통령 혼자 간단한 ‘인사치레’를 하는 것으로 충분히 갈음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대통령실 참모들까지 들러리로 세워 김 여사가 연출할 민망할 장면을 ‘땜빵’한다는 발상은 장기 경기침체와 최고 권력자 가족의 ‘음습한’ 국정개입 의혹에 열 받아 있는 국민들을 기만하고 우습게 보는 행위로밖에 비쳐지지 않습니다.
대통령의 신년 기자회견은 대통령을 생방송 ‘단두대’에 세워 혹시라도 나올 말실수 꼬투리를 잡아 공개 망신을 주는 행위가 아닙니다. 일부 기자들의 진영 논리가 가미된 ‘불손하고’ 공세적인 질문에도 대통령이 답해야 하는 이유는 그가 ‘국민통합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기자들의 불편한 질문에 대통령이 솔직하게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며 양측의 입장차를 국민들이 올바르게 판단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진정한 소통입니다.
하지만 이제 윤 대통령은 정작 국정 최고 지도자가 해야 할 일을 제멋대로 걷어차 버리고 책임 회피를 하는 정치인이 돼 버렸습니다. “모든 책임은 나한테 귀속된다”(The Buck Stops Here)며 온갖 미사여구와 좋은 말은 다 하고 있지만 정작 그 말을 실행할 용기와 책임감이 없다면 대통령은 왜 존재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겸손함까지는 바라지 않지만 국민 앞에 자신이 내뱉은 말 정도는 책임지려는 자세를 보이는 것이 공직자의 기본 태도입니다. 윤 대통령이 당장의 어려움에 도망가는 비겁한 지도자가 아니라 그 버거운 책임마저 자신의 등에 오롯이 짊어지려는 최소한의 양심이라도 보였으면 좋겠습니다. 설 연휴 전 국민들이 마주할 윤 대통령과 KBS의 ‘약속 대련’ 한 장면을 떠올려보니 벌써부터 민망해집니다.
(여성경제신문 2월 6일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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