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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선’의 추억

성기노피처링대표 2023. 1. 19.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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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힘 나경원 전 의원이 17일 대구 동구 팔공총림 동화사를 방문 후 관계자들에게 합장으로 인사하며 떠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3.8 전당대회 도전을 놓고 분기탱천하던 나경원 전 의원이 갑자기 의기소침해져버렸다. 진즉에 타이밍을 놓쳤다고 봤지만 한가롭게 구인사 동화사로 다니며 ‘출마 뉘앙스’를 줄줄 흘리다 결국 윤석열 대통령의 코털을 건드려 납작 엎드린 꼴이 됐다. 그런데 나 전 의원이 결정적으로 ‘한방’을 먹은 것은 윤 대통령의 직접타격이 아니라 새카만 ‘후배’들 때문이었다. 국민의힘 초선의원 50명이 나 전 의원을 직격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던 것이다.

국민의힘 초선의원 50명은 17일 낸 성명에서 나경원 전 의원이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부위원장직 해임이 “대통령의 본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주장한 데 대해 윤 대통령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대통령을 무능한 리더라고 모욕하는 건 묵과할 수 없는 위선이며 대한민국에서 추방돼야 할 정치적 사기행위”라고 나 전 의원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여론조사 추이를 면밀하게 관찰하며 간을 보던 나 전 의원이 ‘고냐, 스톱이냐’를 놓고 한참 고민하고 있을 때 초선 50명이 던진 이 비수 한 방으로 나경원의 기세는 급격히 꺾인 꼴이 됐다. 당권 경쟁자들이나 ‘윤핵관’들의 비판은 권력투쟁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지만 일종의 ‘관전자’라고 할 수 있는 초선 50명이 나 전 의원에게 우르르 몰려가 야유를 퍼붓자 간당간당하게 버티던 나경원의 다리 힘도 풀리고 말았다.

‘후배’들의 응원까지는 바라지 않았겠지만 ‘선배가 잘못된 길로 가고 있으니 대통령에게 사과하라’는 일방적인 비난에 나경원의 당권 도전 명분도 그 빛이 바래고 있다. 여기에 ‘당심’ 여론조사마저 김기현 의원에게 거의 2배 차이로 역전된 결과도 나오고 있어 나경원은 완전 고립무원 처지가 됐다. 이즈음에 나 전 의원측은 “오해가 안 풀린다면 대통령께 죄송하다고 이야기할 것”이라고 밝혀 자포자기 심정으로 던질 수건을 찾고 있는 정황도 포착된다.

여기서 관전 포인트 하나. 점점 코너로 몰려 완전히 때를 놓쳐버린 나경원의 ‘어리숙한 정치행보’는 이미 예상되었던 바지만 무려 50명의 초선의원이 일사불란하게 한 목소리로 ‘윤석열’을 연호하는 국민의힘 분위기는 도대체 무엇인지 알 길이 없다. 집권 2년 차로 한창 권력의 자기력이 남아있는 시점인 데다 ‘찍히면 죽는다’는 대통령의 ‘정치철학’에 완전 압도당했는지, 이번에 초선 50명이 신속 명확하게 ‘윤석열 만세’를 외친 ‘나경원 심판 성명서’는 공당의 책임 있는 정치인이자 각자가 헌법기관인 국회의원들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갖다 대기 민망할 정도로 ‘아첨’의 극치를 달렸다고 본다.

 

국민의힘 장제원 의원(오른쪽)이 5일 오후 서울 송파구민회관에서 열린 국민의힘 송파을 신년인사회에 참석하기 앞서 배현진 의원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유독 21대 국민의힘 초선들은 권력에 순응하는 ‘범생’ 기질이 많이 보인다. 그들은 지난 대선 과정에서도 ‘윤심’(윤석열 대통령의 본뜻)과 주파수를 맞추기 위해 익명으로 ‘초선의 집단의지’를 내세우며 윤석열을 ‘결사옹위’했다. 물론 자당의 대선후보를 지지하는 것은 의원들의 당연한 정치활동이지만 적어도 초선이라면 비판적 자세를 견지하고 너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게 권력의 ‘평형수’를 조절해야 하는 일종의 책임이 있다. 선수가 올라갈수록 대권구도와 밀접한 연결고리가 형성되거나 계파를 만들어 소신 있는 정치행위를 하기 힘들다. 하지만 초선은 패기와 신선함으로 ‘고인물’을 퍼내고 변화와 혁신의 ‘마중물’을 채우는 게 여의도의 관례였다.

하지만 이번 국민의힘 초선 50명의 ‘성명서’는 굳이 이 시국에 내지 않아도 될 것이었다. 해외에 나가 있는 대통령이 비서실장까지 시켜서 즉각적인 반대 의견을 표명하는 ‘실시간 정치’를 완벽하게 하며 ‘나경원 진압’을 진행중인데 굳이 초선의원들까지 나서서 ‘집단 린치’를 할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성명서에는 당초 초선 43명이 이름을 올렸으나 다음날 오전까지 7명이 더 추가돼 총 50명이 서명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뒤늦게 ‘윤석열 눈도장 찍기’의 필요성을 확인한 의원들이 ‘저도 넣어주세요’를 한 것으로 보인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성명서에 이름을 넣지 않는 의원들은 당연히 내년 공천 리스트 ‘위험’에 들어갈 가능성이 있다. 정치권에서는 성명서에 이름을 올리지 않은 의원들 위주의 ‘공천 살생부’가 만들어지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이번 성명서 작성에는 원래 ‘친 홍준표’였다가 윤석열 대통령으로 배를 싹 갈아탄 배현진 의원과 박수영 의원 등 친윤계 의원들이 주축이 됐다고 한다. 그동안 익명으로 ‘친윤’ 색깔의 목소리를 내던 초선들은 이번에는 전부 실명을 그대로 공개했다.

이를 두고 당 안팎에서는 “공천에 목을 매는 불안정한 상태의 의원들이 주로 이름을 올렸는데 이는 명백한 줄 세우기”라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이번 성명서에 서명한 초선 중 영남권 의원은 26명, 비례대표는 14명으로 80%에 달한다. 당선 가능성이 높은 영남권과 지역구 공천으로 정치생명 연장이 필요한 비례대표들은 누구보다도 ‘공천’에 목말라 있다. 일각에서는 “윤석열 대통령이 공천권을 무기로 ‘만만한’ 초선들을 앞세워 국민의힘 ‘당론’을 일방적으로 좌지우지 하려고 한다”는 비판도 나온다.

 

하지만, 한때 초선의원들은 당의 쇄신과 개혁의 상징으로 통했다. 2000년대 초반 한나라당의 개혁 성향 소장파 모임인 ‘남원정’(남경필·원희룡·정병국)이 그랬고, 개혁성향 초선 모임 ‘민본21’ 등도 보수정당에서 쇄신과 변화를 소신 있게 외쳤다. 그 훨씬 전에는 ‘초선 노무현’도 있었다. 노무현이 대통령까지 올랐기 때문에 ‘초선의 교과서’로 내세우는 게 아니라 국회의원 초선은 과연 어떤 역할로 고민을 해야 하는지 질문하는 차원에서 정치사의 한 에피소드를 소개해본다.

 

1989년 5공 청문회에서 노무현 통일민주당 의원이 명패를 잡아 던진 후 거세게 항의하고 있다.



노태우 정권 시절인 1989년 12월 31일, 노무현 당시 통일민주당 의원이 전두환 전 대통령의 광주특위 및 5공특위 및 광주특위 연석회의 도중에 명패를 집어 땅에 내팽개쳐버린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는 여소야대 정국으로 청문회가 TV로 생중계될 정도로 국민적 관심이 높았다. ‘노무현 명패 사건’은 전두환의 뻔뻔한 태도와 반성하지 않는 자세에 울분을 토하던 전 국민의 분노를 그대로 대변해주었고 그는 ‘소신 있는’ 야당 정치인으로 전국적인 인기를 끄는 계기가 되었다.

후일 노무현은 이 명패 사건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다. 그는 자서전 ‘여보 나 좀 도와줘’에서 자신이 속해있던 통일민주당 지도부에게 화가 나 명패를 던졌다고 뒷이야기를 추가로 밝혔다. 노무현은 “이럴 때는 으레 통일민주당도 일어나 야당 편을 들어주는 게 관례였다. 그런데 그때는 달랐다. 뒤쪽 지도부에서 ‘우리 당은 조용히 있어라. 이제 평민당이 다 뒤집어쓰게 되었다’는 식의 의사가 전달되어 오는 게 아닌가”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벌떡 일어나 민정당 의원들을 향해 ‘전두환이가 아직도 너희들 상전이야!’ 하며 소리를 질렀다. 결국 소동이 가라앉지 않자 전두환 씨가 퇴장을 했고 나는 통일민주당 지도부를 향해 욕을 퍼부으며 명패를 집어 바닥에 팽개쳐버렸다”고 설명했다. 노무현은 전두환의 태도에도 화가 났지만 불의를 보고도 정치적 이익 때문에 몸을 사리는 당 지도부를 향해 명패를 던져버린 것이다. 동료의원들이 당 지도부 눈치를 보며 대충 질의를 할 때 노무현은 초선의 패기와 소신으로 저항의 몸짓을 내보인 것이다.




이번 국민의힘 초선의원 50명의 ‘관제 성명’은 정치를 처음 시작한 신인의 자세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설령 나경원의 대응이 잘못됐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동료 의원이고 상대적 약자로 처해 있는 상황이다. 한 정치인이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고 있는 상황에서 최소한의 동료의식도 없이 이름을 ‘공천 보험’에 올리기 위해 권력에 아부하려는 작태는 국민의힘 초선들마저 보신주의와 출세지향주의에 물들어 있음을 말해주는 슬픈 징후다.

1989년 청문회 때 명패를 던지며 오로지 국민과 약자의 입장에서 그들의 울분과 분노를 대변하려 했던 노무현. 그가 지금 살아서 국민의힘 초선 50명의 성명서를 보면 뭐라고 할까.

“정치, 천 년 만 년 할 겁니까. 부끄러운 줄을 알아야지...”

 

(파이낸셜투데이 1월 19일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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