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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의 ‘공’과 윤석열의 ‘사’

성기노피처링대표 2022. 9. 20.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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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일 오후(현지시간) 스코틀랜드 밸모럴성에서 96세로 서거한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사진은 1999년 방한 당시 서울미동초등학교에서 환영을 받는 모습. (사진=연합뉴스)


1997년 8월 31일 런던은 마지막 여름의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습니다. 한국에서는 11월 21일 IMF 국가부도 쓰나미가 몰려올 것을 예측하지 못하고 여전히 흥청망청 분위기가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9000km 떨어진 영국에서는 연일 다이애나 왕세자빈의 ‘스캔들’로 타블로이드가 대목을 누리던 때였습니다. 다이애나빈은 8월 31일 파리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하기 전 이집트 출신 백만장자의 아들 도디 알파예드와 연일 ‘공개밀애’를 즐기는 것이 언론에 대서특필되면서 엘리자베스 여왕을 비롯한 왕실 식구들의 걱정과 분노를 자아냈습니다. 결국 돈에 눈이 먼 파파라치들을 따돌리려다 교통사고가 났고 다이애나빈은 비명횡사하고 말았습니다. 

다이애나빈이 머물던 켄싱턴 궁은 그를 추모하는 인파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당시 런던에서 생활하던 필자도 꽃다발에 추모 메시지를 적어 켄싱턴 궁을 찾았습니다. 개인적인 추모 차원도 있었지만 ‘왕세자빈의 죽음’ 현장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기도 했습니다. 10시간 넘게 조용히 줄을 서서 기다리는 영국인들의 인내심이야 익히 알려진 것이지만 꽃다발에 남겨진 메시지를 하나하나 읽는 모습에서 윈저 왕조로 상징되는 대영제국의 흩어진 정체성을 ‘함께’ 확인하는 공동체 의식도 보였습니다. 

당시 영국 왕실은 다이애나빈의 갑작스런 죽음의 배후에 대한 ‘외부세력’ 개입 음모론이 덧칠되면서 큰 위기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그 비난의 중심에는 다이애나의 비극을 초래한 장본인 찰스 왕세자가 있었습니다. 현 왕비인 커밀라 파커 불스와의 불륜설이 터지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고 그 과정에서 결국 다이애나빈은 불운하게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다이애나빈의 불행을 유발한 찰스 왕세자를 원망했습니다. ‘예쁜’ 왕세자비를 걷어찬 찰스 왕세자의 비정함과 다이애나빈의 미스터리한 죽음이 더해지면서 영국 왕실도 거센 비판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가 19일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런던의 한 호텔을 나서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하지만 그 혼란 수습의 중심에는 1952년부터 영국 왕실을 이끌었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있었습니다. 국민들은 찰스 왕세자의 무책임한 행동에는 실망했지만 엘리자베스 여왕의 헌신적인 태도 앞에 다이애나빈의 죽음도 담담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영국 그 자체였습니다. 몰락해가는 왕가의 든든한 지주였고 구심력이 갈수록 쪼그라드는 영국 연방의 지속성을 확인시켜 주는 상징이기도 했습니다(파이낸셜 타임스). “요즘 세상에 ‘왕’이 죽었다고 전 국가적으로 세금을 낭비하며 과잉 칭송을 하느냐”는 볼멘소리도 나오지만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대영제국’과 윈저 왕조를 지탱하는 큰 기둥이었습니다. 

특히 그의 임종 직전 행보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강렬했습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죽기 이틀 전까지 ‘국정’을 수행하는 강인한 정신력을 보여주었습니다. 지난 6일 리즈 트러스 신임 총리가 예방했을 때 엘리자베스 여왕은 밝게 웃으며 트러스 총리와 악수를 나누는 장면을 ‘연출’했습니다. 당시 여왕의 손등에는 커다란 멍자국이 있었고, 건강에 이상이 있다는 것이 알려졌습니다. 그로부터 이틀 뒤 여왕은 서거했습니다. 또한 그가 사망한 장소는 자신이 기거하던 런던의 버킹엄궁이 아닌 스코틀랜드 밸모럴 별장이었습니다. 이를 두고 전문가들은 여왕이 영국 왕조로부터 독립하려고 들썩거리던 스코틀랜드를 진정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스코틀랜드를 ‘사망 장소’로 택했다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물리쳤다는 삼국지의 옛 이야기처럼 여왕도 죽어서까지 윈저 왕조와 영국 연방을 지속시키려 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평소 연마된 왕조와 영연방에 대한 강인한 공적 책임감이었을 것입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일평생 국가를 위해 헌신했습니다. 여왕은 재임 기간 동안 총 15명의 총리와 마주했고 그 첫 번째가 바로 윈스턴 처칠(1952년)이었습니다. 그는 약 2만 1000개의 약속을 이행했고, 4000개의 법안에 대해 왕실 승인을 했다고 합니다. 또한 그는 2012년 즉위 60주년을 맞아 실시한 ‘영국에서 가장 위대한 국왕’을 묻는 설문조사에서 빅토리아 여왕, 엘리자베스 1세를 제치고 1위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장남 찰스 3세는 다이애나빈과의 비극적 이별과 즉위식에서 보여준 성마른 인품 등으로 국민들에게 그다지 인기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영국 왕조는 잘 유지될 것이라는 견해가 많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것이 엘리자베스 여왕이 70년 동안 닦아놓은 신뢰의 ‘후광’ 덕분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9일 오후 서울 중구 세종대로 주한 영국대사관에 마련된 엘리자베스 2세 여왕 분향소를 찾아 조문한 뒤 방명록을 작성하고 있다. (사진=대통령실 제공)



지도자에게 가장 필요한 품성은 바로 신뢰입니다. 영국 국민들은 찰스 3세 국왕을 마뜩찮게 생각하지만 엘리자베스 여왕이 닦아놓은 신뢰가 있기에 그를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또한 지도자는 어려운 결정을 내릴 때 국민들을 설득하고 소신 있게 밀고 나가는 용기도 있어야 합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다이애나빈이 사망했을 때 실망한 국민들을 보듬어 안고 설득하는 용기를 보여주었고 그것이 위기에 처한 왕실에 큰 힘이 됐습니다. 

그런 여왕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윤석열 대통령은 런던으로 날아갔습니다. 정치 문화적인 차이로 엘리자베스 여왕의 리더십과 윤석열 대통령의 그것을 비교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여왕이 상기시켜준 지도자의 신뢰와 용기 덕목은 우리에게도 시사점을 던져줍니다. 윤 대통령은 취임 직후부터 지지도가 하락 국면에 빠져 있습니다. 그를 지지했던 국민들이 빠르게 이탈하고 있습니다. 신뢰가 추락한 것입니다. 불신 받는 지도자는 그 어떤 국가정책도 제대로 추진할 수 없습니다. 여론 눈치를 보다가 이도 저도 아닌 결정을 내리게 됩니다.


 

윤 대통령에게는 용기도 잘 보이지 않습니다. 국민들의 비판이 있더라도 국가와 미래를 위해 대통령의 비전을 설득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는 최근 영빈관 신축 논란이 일자 알려진 지 하루 만에 전격 철회를 선언했습니다. ‘여론에 순발력 있게 대응한다’는 긍정적 반응보다 대통령의 판단력에 대한 불신을 자초했다는 평가가 더 많습니다. 권성동 의원 말대로 차기 정권을 위해서 더 필요하고 국회와 총리 등이 함께 사용하는 ‘국가 영빈관’을 국격에 맞게 신축하자는 논리라면 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그 필요성을 설명하고 국민들의 이해를 구하면 될 일입니다. 하지만 이런 과정을 모두 생략한 채 그냥 철회를 해버리면 영빈관 신축 추진에 대한 근본적인 저의를 의심받게 됩니다. 정권 내부에서 공감대가 형성된 국가 중요 정책이라면 반대가 있어도 밀어붙였을 것인데 그것이 아니라 일부 실세들에 의해 추진된 것이기 때문에 그 폐기도 손바닥 뒤집듯 쉽게 이뤄진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지금 국민의힘은 이준석 전 대표가 자신에 대한 추가 징계에 대응하기 위해 이 문제를 UN에까지 제소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등 최악의 분열 상태로 빠져들고 있습니다. 국민의힘 내분은 배가 산으로 가는 것도 모자라 멀리 미국 뉴욕까지 가게 생겼습니다. 하지만 윤석열 대통령은 5선의 ‘친윤’ 정진석 비대위원장과 새로 선출된 또 다른 5선의 주호영 원내대표를 자신의 친위대로 앞세워 당을 좌지우지하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꼭 필요한 영빈관 신축 논란에는 없던 용기를 국민의힘 지도부 구성 막후에는 마구 분출하고 있는 것입니다. 스러져가는 왕조와 영연방을 위해 죽기 이틀 전까지 환하게 웃으며 자신의 의무를 수행한 엘리자베스 여왕의 공적 책임감과 10선의 꼭두각시 2명을 앞세워 국민들의 쇄신 열망을 조롱하듯 외면하고 있는 윤석열 대통령의 사심 가득한 정치가 극명하게 오버랩 되고 있습니다. 

 

(여성경제신문 9월 20일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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