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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의 죽음을 기억해야 하는 까닭

성기노피처링대표 2021. 11. 25.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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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연합뉴스)


전두환 씨가 11월 23일 90세를 일기로 사망했습니다. 5.16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대통령의 뒤를 이어 전씨도 12.12 쿠데타로 청와대에 ‘유혈입성’ 했습니다. 그로 인해 ‘민주화의 봄’은 유린됐습니다. 자신의 권력욕을 위해 광주의 무고한 시민들을 총칼로 살육하는 만행도 저질렀습니다. 이에 대해 그는 법적으로 무기징역을 받고 사면되었지만 역사적으로는 여전히 ‘유죄’인 상태입니다. 역사 앞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지만 그는 한 번도 그에 대해 사과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폭도’ 운운하며 광주 학살을 정당화하고 있습니다. 

필자는 초등학교 5학년 때 10.26이 일어나기 전 부마사태를 처음 겪었습니다. 당시 마산의 오동동다리에 진주한 특전사의 육중한 트럭을 처음 보면서 느꼈던 생경한 장면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국군의날에 늠름한 모습으로 행진하는 군인들에게서 느꼈던 무한한 ‘안도감’과 항의하는 시민들에게 무자비하게 곤봉을 휘두르는 그 잔인함이 한 초등학생의 눈에는 너무도 이질적으로 보였습니다. 국민을 지켜주는 멋진 군인이 아니라 ‘우리’를 때리고 죽이는 포악한 군인의 모습이 초등학생 눈에 펼쳐지면서 무엇인가 잘못돼 가고 있다는 걸 어렴풋이 느꼈습니다. 

그리고 1987년 대학에 들어갔습니다. 그때 ‘전두환’의 존재를 다시 알게 됐습니다. 학생회관에서 커튼을 쳐놓고 몰래 숨죽여보던 그 충격의 저화질 비디오 장면이 아직도 마음 한구석에 아리게 남아있습니다. 지금처럼 모자이크를 하던 때도 아니었기 때문에 선혈이 낭자한 부상자들과 영문도 모르고 죽어갔을 시신들을 보면서 밥을 삼킬 수도 없을 정도였습니다. ‘무고한 시민들을 이렇게 죽일 수도 있는 게 권력이구나’ 하는 것을 처음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 권력의 최고봉에 ‘전두환’이 버티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대학입학과 동시에 ‘광주사태’의 실상을 접한 수많은 대학생들은 ‘호헌철폐 독재타도’의 대오 앞에 하나가 됐습니다. 우리의 친구일 수도, 형님 누나일 수도 있는 죄 없는 사람들이 총칼에 무참하게 살해당하는 장면 앞에 운동권과 비운동권을 나누는 건 의미가 없었습니다. 

87년의 대학은 학사 일정이 아예 없었습니다. 날마다 다양한 형식의 ‘가투’와 학내 투쟁이 반복됐고 수업과 시험거부는 일상이 됐습니다. 축제도 요란스럽게 떠들고 술 마시는 게 죄 짓는 것처럼 양심의 가책으로 다가왔습니다. 그 후 ‘광주’와 ‘전두환’이라는 역사의 한 페이지는 당시를 경험했던 40~50대에게 하나의 뚜렷한 개별적인 체험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 개별성은 지금도 40~50대의 진보적이고 개혁지향적인 가치관을 지속시켜 준 정치적 DNA로 존재합니다. 이들은 “무력으로 쿠데타를 일으키고 그것에 항의하는 국민들을 살해하는 권력의 폭력성은 지금도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전두환’의 권력찬탈과 국민살육의 ‘폭력성’은 시민들의 정치참여를 끊임없이 일깨워주는 ‘역사적 경계(警戒)’가 되고 있습니다.


 

지금의 40~50대에게 ‘전두환’은 일국의 대통령이라는 보편적 사실보다 정치를 처음 깨닫게 해준 개별성의 존재로 인식됩니다. 전두환은 단순히 한 나라를 다스리는 대통령이라는, 그래서 평범한 국민들과는 동떨어진 먼 곳의 대통령이 아니라 한 개인의 삶을 송두리째 파괴할 수도 있다는 ‘공포’를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신문에서나 펼쳐지던 유명한 권력자들의 무용담이 남 일처럼 여겨졌지만 ‘전두환’이라는 존재는 국민의 개별적인 삶에까지 침투해 그들을 무고한 죽음으로 내몰 수도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광주의 비극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 하나로 더 이상 역사속의 장면이 아니라 우리들 삶을 구체적으로 파괴할 수도 있다는 국가폭력의 상징적 사건입니다. 


그런데 전두환 씨의 죽음을 놓고 그 반응이 양분되고 있다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청와대와 여야 대선후보 모두 조문을 하지 않을 예정이라고 합니다. 전두환 씨 정치 ‘찬양’으로 논란을 일으켰던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는 처음 ‘조문하러 간다’고 했다가 주변의 만류에 그 뜻을 접었습니다. 전두환이 창당한 ‘민정당의 후예’로 여겨지는 국민의힘은 논평도 내지 않아 더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정치권과 국민들의 대체적인 반응은 ‘사과 한번 없었던 것이 유감’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전씨의 경제 치적 등을 두고 국가발전을 위해 공헌한 것도 있다는 반응도 있습니다. 

개인의 정치적 가치관에 따라 전두환 씨의 죽음에 대한 평가는 다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전두환’이 광주시민들을 학살하고 권력을 찬탈한 것을 정당화할 수는 없습니다. 80년 6월 계엄사가 발표한 민간인 사상자는 148명이었습니다. 검찰의 5.18 사망자 검시조서 기준으로 보면 165명입니다. 이것은 정부 공식 자료일 뿐, 5.18 당시 사망자가 2000명에 이를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지금까지 5.18 관련 심의보상 단계에서 5.18 현장과 이후 관련 후유증으로 사망한 숫자가 218명으로 집계되고 있습니다. 일각에서는 재야에서 제기되었던 사망자 2000명설은 부풀려진 측면이 있다는 주장도 있지만 여전히 우리는 5.18의 희생자 숫자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번 스러진 생명은 되돌릴 수 없습니다. 남은 유족들은 그 죽음을 평생 가슴속에 묻고 삽니다. 하지만 광주의 비극은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역사적 진실이 아니라 해석의 영역으로 변질되려고 합니다. 우익보수성향의 국민들은 그렇다 치고 정치인들에게까지 그런 경향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최근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는 “전두환 대통령이, 군사 쿠데타와 5.18만 빼면, 잘못한 부분이 이제 그런 부분이 있지만, 그야말로 정치는 잘 했다고 얘기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예, 그거는 호남 분들도 그런 얘기 하시는 분들이 꽤 있어요. 그 왜 그러느냐, 맡긴 거예요. 이 분은 군에 있으면서 조직 관리를 해봤기 때문에, 예, 맡긴 겁니다”라고 발언했습니다. 

 

24일 오전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 5.18민주묘지에서 김점례 씨가 1980년 5월 당시 계엄군의 총에 맞아 숨진 아들의 묘소를 찾아 눈물 흘리고 있다. 김씨는 전날 사망한 전두환을 두고 "잘못했다는 한마디조차 없이 떠났다. 너무나 원통하다"며 통곡했다. (사진=연합뉴스)


윤 후보의 이런 발언은 즉흥적인 것이 아닙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역사적 진실이 빛이 바래 생기는, 집단 기억상실증의 한 증상입니다. 시간은 기억을 소멸시키고 왜곡된 진실을 그 자리에 올려놓을 수 있습니다. 최근의 전두환 씨 죽음에 대한 평가 논란은 역사적 진실도 얼마든지 퇴행적으로 변해갈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광주의 진실은 세월이 흐르면 퇴색되는 도화지의 그림이 아닙니다. 그것은 후대의 눈에 선명하게 찍혀 있어야 할 총천연색의 컬러사진이어야 합니다. 빛이 바랜다고 해서 진실도 바래는 것이 아닙니다. 광주의 진실은 그 누구에게도 소중하게 적용돼야 할 천부의 인권이자 소중한 생명이 빼앗긴 역사적 비극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전두환 때가 살기 나았다” “전두환이 5.18 빼면 정치도 잘 했다”는 등의 시각이 점증해지고 있습니다. ‘그래도 전두환이 잘 한 게 있으니 그의 공도 인정해주자’는 시각은 살인자의 살해 정당성을 인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 논란이 되고 있는 전두환 공과론은 정치적인 해석의 차이입니다. 하지만 단 한 명의 시민이라도 죄 없이 권력의 총칼에 무참하게 살해당했다면 그것은 우리가 반드시 단죄해야 할 역사적 과제입니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200명에 이르는 피 같은 생명이 스러져간 역사적 진실은 해석의 영역이 아니라 사실의 영역인 것입니다. 죄 없는 생명을 죽음으로 몰고 간 권력에 대해 끝까지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 ‘살인자’는 사과조차 하지 않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전씨의 유족들과 그 정치 잔당들은 아직도 고개를 빳빳이 들고 사과여부를 묻는 기자들에게 ‘질문을 똑바로 하라’며 당당하게 대응합니다. 죄의식은커녕 시대적 상황 운운하며 자신들의 대죄를 정당화하려 합니다. 

1979년 한 초등학생이 날마다 오가던 오동동다리에서 목도한 장면은 생경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눈물을 왈칵 쏟았던 그 정체불명의 가스가 최루탄이라는 걸 대학에 입학하면서 알았습니다. 국민들에게 억지로 눈물과 고통을 강요하는 것이 권력이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결국 악의 편, 방관은 최대의 수치, 비굴은 최대의 죄악”(김대중 전 대통령)이라는 말도 ‘전두환’과 ‘광주’의 역사적 진실을 알고 난 후 더욱 구체화 됐습니다. 전두환 씨처럼 한 국가의 대통령이 국민 개개인의 삶에 이토록 폭력적으로 ‘난입’을 한 경우가 있었을까요. 전씨는 죽었지만 그가 남긴 역사적 과오는 반드시 기억돼야 합니다. 무고하게 희생된 죽음으로 평생 고통 받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한. 

 

(11월 25일 팩트경제신문 '정치언박싱'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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