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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영원한 비서실장' 김정렴 별세...차지철도 꼼짝 못했던 '그림자 실세'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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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영원한 비서실장' 김정렴 별세...차지철도 꼼짝 못했던 '그림자 실세'

성기노피처링대표 2020. 4. 27. 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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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강경출신으로 강경상고와 조선은행을 거쳐, 재무장관, 상공부장관을 지낸 김정렴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장이 1969년 10월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비서실장 임명장을 받고 있는 모습. 박정희 정부 최장수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낸 김정렴 회장은 1960~1970년대 한국 경제 고도성장의 기틀을 마련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사진=김 전 실장의 회고록에서 발췌] 

 

 

비서실장은 대통령비서실의 수장으로 장관급 정무직 공무원이다. '비서'라는 직함이 붙는 공무원 중 가장 높은 직급이다.

대한민국 정부체계에서는 제2공화국 시절인 1960년 처음으로 설치되어, 이재항 실장이 초대 비서실장에 임명되었다. 이후 곧바로 5.16 군사정변이 발생하고 박정희 대통령이 집권해 비서실을 개편, 대통령 친정체제를 강화하는 데 사용했다. 제1공화국, 2공화국 때는 비서실 내 정해진 고유 업무가 없어 보좌관들이 비서업무를 대행하는 구조였다.  이때만 해도 비서실은 직제상 존재할 뿐 이렇다할 역할이 없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 때 공식적으로 비서실이 대통령 직속부서로 힘을 갖게 되었고, 중앙정보부장 직위에 비서실장 이후락이 임명되는 등 점차 힘이 생겼다. 비서실은 박 대통령 친정체제 구축의 전진기지 역할을 했다. 초기 비서실은 박정희 정권의 민생계획 등 주요 정치 현안에 관여하기도 했다.

 

하지만 초기의 무소불위 비서실은 점차 그 위상이 떨어졌다. 경호실과의 권력갈등이 생기면서부터다. 제4공화국 이후에는 군부세력의 힘이 더 커지면서 경호실장 차지철을 중심으로 대통령경호실이 비서실 업무에 간여해 정작 비서실장이었던 김계원조차도 대통령 만나는 빈도가 차지철에 비해 떨어질 정도로 10.26 사건 당시에는 유명무실한 존재에 가까웠다. 1974년 경호실장에 임명된 차지철은 해를 거듭할수록 비서실과 중앙정보부 등을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차단하면서 자신의 위세를 과시했다. 

1974년 차지철이 청와대에 경호실장으로 들어왔을 때 비서실장이 바로 김정렴(96.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장)이었다. 지난 4월 25일 오후 10시 별세한 김정렴 전 비서실장은 박정희 정부에서 최장수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내며 1960~70년대 경제성장을 주도했다. 김 전 실장은 재무부·상공부 장관을 지냈고, 1969년 10월부터 1978년 12월까지 9년 3개월간 대통령 비서실장을 맡아 박 전 대통령을 보좌했다.

 

1953년 12월 1일 한국은행 뉴욕사무소 개소식에서 유창순 사무소장(왼쪽에서 둘째)과 함께 기념촬영을 한 당시 뉴욕 연방준비은행 연수생 김정렴(왼쪽 끝). 한은 뉴욕사무소는 민간 부문 최초의 탈(脫)아시아 사무소였다.

 

박정희 정부 주요 인사들은 김 전 실장이 계속 비서실장을 했더라면 박 전 대통령이 서거한 10·26 사태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박정희 정권에서 그의 빈자리가 그만큼 컸다는 뜻이다. 왜 그런 이야기가 나올까. 

 

시계추를 차지철이 청와대에 입성했던 1974년 전후로 되돌려보자. 10.26의 근원적 단초를 제공했던 차지철. 그는 과연 어떻게 청와대 경호실로 들어오게 되었을까.  

 

차지철은 1961년 5.16 군사정변 때 대위 계급으로 공수특전단에 근무하며, 쿠데타에 적극 참여했다. 그 뒤 육군 소장 박정희가 의장인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경호차장이 되었고, 박정희가 집권하자 1962년 3월 20일에 소령으로 진급하고, 2달 뒤인 5월 31일에 중령으로 특진하게 되고, 3달 뒤인 8월 21일에 예편하였다. 차지철은 박정희의 초대 경호실 멤버로 약 1년여 정도 활동하다가 보스 곁을 떠나게 된다. 이때만 해도 그는 초고속으로 중령 계급장을 달고 군을 떠났던 평범한 예비역이었다. 

 

차지철의 다음 행로는 정치였다. 그는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전국구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30살의 나이로 국회의원이 되었다. 이후 국회 외무위원장, 내무위원장까지 맡으며 승승장구한다. 그가 외무위원장 맡을 때의 나이가 36세였다. 박정희의 든든한 뒷배가 작용한 결과였다. 청와대로 가기 직전 그는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경기도 광주군-이천군-여주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신민당 오세응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박정희의 곁을 떠난 지 만 10년을 국회의원으로 지내며 외곽에서 청와대를 지원하는 역할을 했다. 

 

그런 그가 다시 권부의 핵심으로 돌아오게 된 계기가 바로 1974년 문세광의 저격으로 육영수 여사가 사망하는 사건이었다. 차지철은 책임을 지고 물러난 피스톨 박 박종규 대신 경호실장이 되었다. 당시 박종규나 당시 국무총리 김종필은 전 국세청장 오정근을 경호실장으로 추천하였지만, 박정희의 의지로 결국 마흔살의 차지철이 내정되었다. 당시 신문기사는 차지철을 박정희의 친위 중의 친위라고 소개하고 있다. 당시 차지철이 경호실장에 임명된 배경에 대해 "여자 관계가 깨끗한 데다 술담배도 하지 않으며, 우직하게 박정희 대통령에게 충성하는 자세를 높이 샀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하지만 차지철의 야심은 컸다.

 

 

박정희 대통령은 월간경제동향보고, 수출진흥확대회의 등을 통해 국정의 핵심을 파악하고 관련자들에게 확실한 메시지를 전했다. 사진은 박 대통령이 수출진흥확대회의를 주재하는 모습. 

 

그가 물론 박정희 대통령의 초기 경호실 멤버로 활동하며 나름대로 최측근 역할을 했지만 그 당시만 해도 박종규 김종필 등에서 볼 때 주류는 아니었다. 엄청난 충성심으로 차지철은 서서히 주류로 선 케이스다. 그가 이런 우여곡절 끝에 청와대로 입성했을 때 비서실장이 바로 김정렴이었다. 청와대의 양대 산맥으로 두 사람은 약 4년 동안 박정희 대통령을 보좌했다.

 

김정렴 전 비서실장은 차지철과는 완전히 다른 인물이었다. 그는 오로지 국가 발전에만 전념했던 정통 경제 관료였다. 1924년 서울에서 태어난 김 전 실장은 1944년 한국은행 전신인 조선은행에 입행했다. 그러나 그 직후 강제 징집돼 일본군에 배속된 뒤 히로시마에서 일제 패망을 맞았다. 한국은행 재직 시절인 1953년 29세의 나이로 1차 통화 개혁 전문을 기안했다. 1959년 재무부로 옮긴 뒤 정통 경제 관료의 길을 걸었다. 

이때까지 김 전 실장은 박 전 대통령과 별다른 인연이 없었다. 1962년 5월 당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공관에 불려가 통화 개혁에 관한 브리핑을 하면서 박 전 대통령을 처음 만났다. 이때 김 전 실장이 박 전 대통령의 경호차장이었던 차지철과도 한번쯤 조우했음 직하다.

 

김 전 실장은 사심 없이 박 전 대통령을 대한 것으로 유명하다. 김 전 실장은 박 전 대통령과 별다른 연고가 별로 없었지만 그 뒤 충심을 다해 박 전 대통령 곁을 지켰다. 박 전 대통령 시절 경제수석을 지낸 정소영씨는 “김 전 실장은 무에서 시작해 순전히 성실성과 능력으로 박 전 대통령의 눈에 들었다”고 했다고 한다.


 

1966년 재무부 장관, 1967년 상공부 장관에 오른 김정렴 회장은 1969년 3선 개헌안이 통과된 직후 비서실장에 임명됐다. 김 회장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청와대로 불려가 "각하, 저는 경제나 좀 알지 정치는 모릅니다. 비서실장만은 적임이 아닙니다"라고 말하자, 박 대통령이 "경제야말로 국정의 기본이고 경제가 잘돼야 정치·국방도 튼튼하게 할 수 있다"면서 설득했다고 전했다.

 

김 전 실장은 회고록에서 비서실장을 지내는 동안 외부 인사와 점심이나 저녁을 먹은 적이 없다고 했다. 김 전 실장의 아들인 김준경 전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은 “비서실장 시절 저녁 6시30분쯤 퇴근하면서 그날 못 본 조·석간 신문과 서류 뭉치를 들고 와 7시부터 맥주 한 잔을 곁들인 식사를 했고, 10시까지 식탁을 떠나지 않은 채 읽고 또 읽으시던 기억이 난다”며 “9년 내내 그런 생활을 했다”고 했다. 이런 이유로 사교적인 성격이었던 그는, 퇴임 이후 친구도 별로 남지 않았었다고 김 원장은 전했다. 

 

김 전 실장은 평소 ‘작은 비서실’을 강조했다. 그는 “대통령과 국무회의에서 정책을 결정하면 집행하는 것은 행정부 관료이며, 직업 공무원들은 엘리트다”라며 “이들이 열심히 뛰어야 하는데 대통령 비서실과 국무총리실이 커지면 안 된다”고 했다. 

 

김 전 실장에 대한 박 전 대통령 신임은 점점 커졌다. 김종필 전 총리는 고인을 두고 생전에 “김정렴은 차지철이 비서실장을 제치고 대통령에게 먼저 보고하거나 중앙정보부장과 월권 문제로 정면 충돌하는 일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다”며 “대통령 신임이 두터워 차지철과 김재규가 비서실장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김정렴 전 실장은 10·26 발생 1년 전인 1978년 12월 총선에서 여당인 민주공화당이 야당인 신민당에 득표율 1.1%포인트 차로 패하자 책임을 지고 청와대를 떠났다. 

 

최장수 비서실장을 지낸 후 김 회장은 1979년 주일 대사를 맡아 청와대를 떠났다. 주일 대사로 부임하기 전 청와대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과 찍은 기념사진. 

 

바로 여기서부터 10.26의 비극이 시작된다. 김정렴 전 실장은 '청와대가 작아야 경제정책이 원활하게 돌아간다'는 소신을 갖고 있었다. 그는 회고록에서 "비서실장에 취임하자마자 시도한 일은 비서실 축소였다"며 약 10명의 경제 관련 비서관을 감원하는 등 청와대 조직을 통폐합했다고 했다. 그는 또 "비서실 사람들은 기자회견이나 강연 같은 것에 임해선 안 된다"면서 "명함 만드는 일도, 청와대 마크가 새겨진 봉투를 바깥에 갖고 나가는 것도 삼가야 한다"고 했다. 

 

이런 작은 청와대 소신은 차지철과는 확연히 다른 것이었다. 차지철은 청와대에 입성한 뒤 김 전 실장이 떠날 때까지 그와 별다른 갈등을 일으키지 않았다. 박 대통령의 신임이 워낙 두터워 그가 월권을 할 상황도 아니었다. 김 전 실장의 청렴함과 카리스마가 야심가 차지철의 목을 자연스럽게 틀어쥐고 있었던 것이다. 남에게 질타를 받을 만한 일을 절대 하지 않았던 김 전 실장의 깨끗한 생활 때문에 차지철도 그 위세에 눌려 제대로 자신의 야심을 펼칠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만약 김 전 실장이 계속 청와대에 있었더라면 차지철이 그렇게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권력을 함부로 휘두르는 일은 없었을 것이고,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도 첨예한 갈등을 빚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청와대에 오래 근무한 김 전 실장이었기에 양측의 갈등을 그대로 보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차지철은 김정렴 전 비서실장이 빠져나간 뒤 청와대의 넘버원으로 군림했다. 비서실장이 김계원으로 교체된 1979년부터는 경호실에서 비서실 업무에 간섭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때 김계원은 육군 대장 출신으로 중앙정보부장직에서 해임되고 주 대만 대사를 거쳐 비서실장에 임명됐는데, 이것은 김계원이 부총리급인 중앙정보부장에서 장관급인 비서실장으로 좌천되어서 차지철이 김계원을 무시했다고 한다. 김정렴이라는 정통 경제관료 출신 비서실장과는 업무 성격상 충돌할 일이 별로 없었지만 만만한 김계원이 비서실장으로 오면서 상황도 달라졌던 것이다. 

 

차지철의 전횡은 비서실뿐 아니라 중앙정보부와도 갈등을 일으켰다. 차지철은 경호실의 공금으로 대규모의 사설 정보팀을 운영했다.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에게 보고할 때도, 경호실장이 동석해야 한다라고 억지를 부렸다고 한다. 김재규는 이런 월권 행위를 상당히 불쾌하게 생각했으나, "내가 중장 출신인데 어찌 저런 예비역 중령이랑 옥신각신하겠나"라고 분을 삭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나지 않고, 차지철은 김재규가 박정희에게 무언가 말을 하면 중간에 자르고 자신이 하고 싶은 말들을 해버려 김재규를 상당히 화나게 했다고 한다. 

 

경호실 산하 부대들을 창설한 뒤 특제 제복을 입혀 완벽하게 박정희의 친위대로 만들려고도 하였다. 이들 경찰·군부대들의  101,  22,  33,  55,  88  등의 같은 숫자가  두 번  쓰인 독특한 이름들을 지은 것도  차지철이다.

 

김정렴 전 비서실장은 1969년 10월부터 1978년 12월까지 9년 3개월간 대통령 비서실장을 역임했다. 역대 정부를 통틀어 최장수 비서실상 재임 기록을 갖고 있다. 그만큼 박정희 대통령이 신뢰했던 인물이다. 

 

그가 최장수 비서실장이라는 영예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특유의 겸손함과 성실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김 전 회장은 정치회고록 ‘아, 박정희’에서 “청와대 비서실을 구성하는 수석비서관·비서관·행정관은 대통령의 그림자처럼 행동해야 하고, 대통령이란 큰 나무의 그늘에서 존재가 있는 듯 없는 듯 묵묵히 일해야 한다”면서 “그 그늘을 벗어나 양지로 나와 존재를 과시하면 안 된다고 믿는다”고 강조했다.

그가 비서실장 취임 당시 직원들에게 당부했던 말을 보더라도 그의 이런 철학이 드러난다. 그는 “국민이 청와대를 쳐다볼 때 각하 내외만 보여야지 비서관들이 보여선 안 된다”면서 “나를 포함해 우리 비서관들은 뒤에서 소리없이 각하 내외를 보필하고 각하와 행정부 간의 윤활유 역할을 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김정렴 전 비서실장같은 충신을 떠나보내면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균형감각도 많이 무뎌졌던 게 아닌가 한다. 대통령을 사심 없이 보좌했던 김 전 실장 재임시에는 박 전 대통령도 절대권력이었지만 주변을 의식하며 통치를 했다. 하지만 간신에다 자신의 권력욕을 채우기 위해 대통령 뒤에서 호가호위했던 차지철이 전면에 나서면서 박 전 대통령의 판단력도 많이 흐려졌던 것이 아닐까.

 

비서실장은 말 그대로 '보이지 않는 일'을 하는 참모 가운데 최고위직이다. 김정렴은 그 전형을 만들었던 인물로 평가받는다. 자신을 극도로 낮추고 오로지 공적인 일 앞에서 개인의 빛은 지워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그 빛 뒤의 그림자는 차지철을 누를 만큼 권위있고 강력했다. 사리사욕에 빠지지 않고 오로지 국가를 위해 일 한다는 공직 문화가 우리 정치에도 하루빨리 뿌리내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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