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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기노의 정치 피처링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별세...'실패'로 국가경제에 기여한 풍운아 본문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2019년 12월 9일 오후 11시50분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3세. 그는 한국 경제사에서 특이한 존재였다. 대부분의 재벌들이 오너의 자녀들에게 경영권을 승계해 부를 이어갔지만 그는 빈털터리 샐러리맨에서 재계 2위 그룹 총수로 도약한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하지만 역대 최대 규모의 부도를 내고 해외도피 생활을 하는 등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보냈다.
김 전 회장의 ‘세계경영’의 성공신화는 만 30세 때인 1967년부터 싹을 틔웠다. 섬유 수출업체인 한성실업에 근무하던 ‘청년 김우중’은 트리코트 원단생산업체인 대도섬유의 도재환씨와 손잡고 대우실업을 창업했다. 대우(大宇)는 대도섬유의 대(大)와 김우중의 우(宇)를 따서 만든 것으로 전해졌다.
당시 자본금 500만원으로 출범한 대우실업은 첫해부터 싱가포르에 트리코트 원단과 제품을 수출해 58만 달러 규모의 수출실적을 올린 데 이어 인도네시아, 미국 등지로 시장을 넓혀 큰 성공을 거뒀다. 트리코트 원단과 와이셔츠 수출로 대우그룹 축성의 종잣돈을 마련한 고인에게는 ‘트리코트 김’이라는 별칭이 따라붙기도 했다. 직접 샘플 원단을 들고 대우의 첫 브랜드인 영타이거를 알렸던 고인은 동남아에서 ‘타이거 킴’으로도 이름을 알렸다.

대우실업은 1968년 수출 성과로 대통령 표창을 받으며 급성장 가도를 달렸다. 1969년 한국 기업 최초로 해외 지사(호주 시드니)를 세웠고, 1975년 한국의 종합상사 시대를 연 이후 김회장이 이끈 대우는 국내 중소기업의 수출창구가 됐다
1973년에는 영진토건을 인수해 대우개발로 간판을 바꿔 달고 무역부문인 대우실업과 합쳐 그룹의 모기업격인 ㈜대우를 출범시켰다. 1976년에는 옥포조선소를 대우중공업으로 만들었고, 1974년 인수한 대우전자와 1983년 대한전선 가전사업부를 합쳐 대우전자를 그룹의 주력으로 성장시켰다.
대우그룹은 에콰도르(1976년)에 이어 수단(1977년), 리비아(1978년) 등 아프리카 시장 진출을 통해 해외사업의 터를 닦았다. 김 전 회장의 거침없는 확장 경영의 결과 창업 15년만에 대우는 자산 규모 국내 4대 재벌로 성장했다.
해외영업에서 남다른 수완을 발휘한 김 전 회장은 ‘박정희 정권’에서 가장 두드러진 기업인으로 주목받았다. 박 전 대통령이 김 전 회장의 부친이 대구사범 은사라는 것을 알게 된 이후 절친한 사이가 된 것으로 재계에서는 전해진다.
김 전 회장은 1980∼90년대에도 저서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에서 강조한 대로 ‘세계경영’에 매진했다. 1990년대 동유럽의 몰락을 계기로 폴란드와 헝가리, 루마니아, 우즈베키스탄 등지에서 자동차공장 등을 인수하거나 설립하며 세계경영을 본격화했다.

이에 따라 대우는 1998년말에는 396개 현지법인을 포함해 해외 네트워크가 모두 589곳에 달했고 해외고용 인력은 15만2000명을 기록했다. 당시 고인은 연간 해외 체류기간이 280일을 넘기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러나 1997년 11월 닥친 외환위기는 세계경영 신화의 몰락을 불러왔다. 김대중 정부 경제관료들과의 갈등과 마찰을 빚으면서 붕괴가 빨라졌다. 1998년 3월 전경련 회장을 맡은 김 전 회장은 ‘수출론’을 집중 부각했지만, 관료들과 갈등은 여전했고 오히려 개혁의 대상으로 내몰리는 상황을 맞았다.
1998년 당시 그룹 구조조정의 최우선 핵심사안으로 꼽혔던 대우차-제너럴모터스(GM) 합작 추진이 흔들렸고, 금융당국의 기업어음 발행한도 제한 조치에 이어 회사채 발행제한 조치까지 내려져 급격한 유동성 위기에 빠졌다. 당시 일본계 증권사의 ‘대우그룹의 비상벨이 울리고 있다’는 보고서가 나온 것을 계기로 상황은 급격히 나빠졌다.
대우그룹은 1999년 말까지 41개 계열사를 4개 업종, 10개 회사로 줄인다는 내용의 구조조정 방안을 내놨지만, 1999년 8월 모든 계열사가 워크아웃 대상이 되면서 그룹은 끝내 해체됐다.
김 전 회장은 대우그룹 분식회계를 주도한 혐의로 2006년 징역 8년6월과 벌금 1000만원, 추징금 17조9253억원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2008년 1월 특별사면됐다.
당시 김 전 회장이 추락의 길을 걸었던 결정적 이유는 교만과 현실감각 상실이었다. 그는 생전에 평생 후회했던 일로 전경련 회장을 맡은 일이었다고 한다. 은행 대리에게도 90도로 절하던 그가 전경련 회장직을 맡으면서 경제 대통령이나 된 것처럼 우쭐해지면서 사람이 달라졌다는 평가도 있었다. 어느 때부터 고위 관료에게까지 ‘이리로 오라고 그래’라는 말을 하면서 정부와 멀어졌고 대우가 휘청거릴 때 이런 불편한 관계가 반 대우 정서와 정책을 통해 나타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김 전 회장은 여러 차례 “내가 전경련 회장을 맡지 않았더라면 경제관료들과 갈등을 빚지 않았을 것이고, 그렇다면 대우 해체로 이어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직원들에게 말해왔다. 당시 김 전 회장은 전경련 회장을 맡은 뒤부터 경제관료들을 우습게 알고 자신의 '능력'을 과신했던 측면이 있다. 하지만 김 전 회장 입장에서는 전경련 회장으로서 기업의 입장을 대변해야 했기 때문에 자신이 표적이 돼 정부압력을 온몸으로 받아야 했고, 결국 경제 관료들과의 갈등으로 대우그룹이 해체됐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다음은 김 전 회장이 말하는 일화 한토막.
2014년 신장섭 싱가포르국립대 교수가 집필한 대화록 '김우중과의 대화'에서 김 전 회장이 언급한 일화에 따르면 김 전 회장은 1998년 4월 서울 남산의 힐튼호텔에서 김대중 정부 초대 비서실장 주재로 청와대 A 경제수석과 마주 앉았다.
이 자리에 김 전 회장은 "올해도 수출을 조금만 더 하면 500억달러 흑자 난다. 그것으로 IMF(국제통화기금)에서 빌린 돈 다 갚고도 남고, 내년에 500억달러 흑자 나면 외환보유액(Reserve)이 된다.… 우리가 미국에 귀속해서 가는 것은 말이 안된다"고 했다.
김 전 회장의 이런 제안은 수출을 도와달라는 취지였다. 이에 A 수석은 "이제 시장경제 중심으로 하니 정부가 나서서 그런 것 못 합니다"라고 답했다. 그러자 김 전 회장은 "그러면 수석은 시장경제 하는데 무엇 때문에 거기 앉아 있나? 시장 중심이면 청와대 경제수석이고 비서관이고 필요 없겠네"라고 맞받아쳤다. 이 사건은 1999년 8월 대우그룹이 어려움에 처해지기 직전 벌어진 일로 김 전 회장과 김대중 정부 관계자들의 충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또한 그는 ‘김우중과의 대화-아직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에서 대우그룹 해체가 경제관료의 정치적 판단 오류 때문이라는 ‘기획 해체론’을 주장했었다. 하지만 김 전 회장과 대우그룹의 차입을 통한 과잉투자가 그룹 해체의 주된 이유라는 시각도 팽팽하다.
정부와의 갈등도 있었지만 김 전 회장이 IMF 상황을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측면도 있다. 현실적인 감각이 떨어져 다가오는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고 ‘수출해서 갚으면 되지 뭘 그래’라며 그의 특유의 낙천성으로 덮으려 했지만 이미 늦어버린 상태였다.
당시 김 전 회장은 김대중 대통령당선자에게 외환위기 극복을 위한 해법으로 ‘500억 달러 무역 흑자론’을 내걸었다. 수출을 확대해 외화를 벌어들여 외환이기를 극복해야 한다는 주장이었지만 ‘한국 기업의 부채를 줄여야 한다는 국제금융기구(IMF)의 가이드라인을 고집하던 경제관료들에게는 설득력이 없었다.
김 전 회장의 경영 방식은 ‘기술이 없으면 사오면 된다’ ‘사업은 빌린 돈으로 하고 벌어서 갚으면 된다’ 등 공격적인 사업 스타일로 유명했다. 이는 정부와의 좋은 관계 속에서는 득이 됐지만 대우를 지켜주던 정부의 안전판이 무너지자 그런 공격적인 경영방식은 오히려 독이 됐던 것이다.

김 전 회장은 말년에 ‘제2의 고향’ 베트남 등을 오가며 글로벌 청년사업가 양성 프로그램에 주력하며 명예회복에 나섰다. 그는 2014년 10월 2일 연세대 대우관 각당헌에서 열린 ‘연세대 상경대학 창립 100주년 기념 초청 특강’에서는 “개발도상국 한국의 마지막 세대가 돼서 ‘선진 한국’을 물려주고 싶었다”면서 “우리는 아직 선진국에 진입하지 못하고 있다. 미안하고 부끄럽게 생각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고인은 17조원에 이르는 미납 추징금과 세금을 내지 못하고 1년여 투병 생활을 하다 생을 마감했다. 김 전 회장은 지난해 12월말부터 건강이 나빠져 장기입원과 통원 치료를 반복했으며 최근 입원한 것으로 전해졌다. 김 회장은 약 1년여간 투병 생활을 하는 가운데 연명치료는 하지 않겠다는 평소 뜻에 따라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화롭게 영면에 들어갔다.
장례는 가족장으로 치러진다. 유족은 부인 정희자 전 힐튼호텔 회장, 장남 김선협 ㈜아도니스 부회장, 차남 김선용 ㈜벤티지홀딩스 대표, 장녀 김선정 (재)광주비엔날레 대표이사, 사위 김상범 이수그룹 회장 등이 있다.
빈소는 아주대병원 장례식장 1호실에 마련됐다. 조문은 10일 오전 10시부터 가능하다. 영결식은 12일 오전 8시 아주대병원 별관 대강당에서 거행된다.
개방도상국 한국의 마지막 세대였던 김 전 회장은 '선진 한국'을 물려주고 싶었던 바람을 완성하지 못하고 영면에 들어갔다. 하지만 한국경제가 튼튼하고 경쟁력 있는 체질로 바뀌는 데 그의 '실패'가 큰 교훈을 주었음은 물론이다. 성공으로 국가에 큰 몫을 하는 기업인도 있지만, 김 전 회장은 실패로 국가경제에 기여한 재계의 풍운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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