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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6 40주년] '박정희 살해' 김재규의 난…배신자, 혁명가, CIA?

성기노피처링대표 2019. 10. 25.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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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1월 7일에 서울 종로구 궁정동의 중앙정보부 안가 만찬장에서 열린 10·26 사건 범행 현장검증에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차지철 경호실장과 박정희 대통령에게 총을쏘던 상황을 재연하고 있다. 

 

10월 26일은 특별한 날로 기억된다. 올해는 궁정동 안가에서 유신 정권을 일거에 무너뜨린 총성이 울린 지 40년이 되는 날이다. 강산이 네 번이나 바뀌었지만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은 여전히 분분하다. 김재규는 수십년 동안 박정희 가문의 권력을 나누며 호의호식했음에도 그 은혜를 입은 주군을 살해한 극한의 배신자였거나, 유신의 폐해에 정면으로 맞서며 들불처럼 일어나려 했던 '10월 혁명'의 완결자이자 의사였거나, 통제불능의 한 아시아 변방 독재자 골칫거리를 간단하게 제거하는 데 동조했던 CIA 스파이였거나, 어쨌든 대한민국의 역사를 관통했던 풍운아였다. 그의 행위를 둘러싼 역사적 해석과 논란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40년이 흘렀다. '김재규의 난', 그것은 지금 현재 우리들에게 어떻게 기억되고 있을까.

먼저 역사적 팩트부터 살펴보자. 박 대통령 시해 혐의로 체포된 김재규와 박선호 의전과장을 비롯한 중정 직원 6명은 그해 12월 20일 계엄보통군법회의 1심과 2심(80.1.21)에서 모두 사형 선고를 받았다.

육군 대령이던 박흥주 중정부장 수행 비서관은 단심으로 사형 판결을 받고 이듬해 3월 6일 총살형에 처해 졌고, 김재규 외 6명에 대해서는 대법원 상고 기각 나흘만인 5월 24일 교수형이 집행됐다. 

경호실에서도 차지철 실장, 정인형 처장, 안재송 부처장, 김용섭, 김용태(이상 경호원) 등 5명이 현장에서 중정 경비원들의 총탄에 맞아 숨졌다.

정승화(2002년 사망) 육군참모총장은 1980년 내란 방조 혐의로 기소돼 계엄보통군법회의에서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이후 징역 7년으로 감형된 그는 1995년 9월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재심을 신청했고, 1997년 무죄 판결을 받았다. 

다만, 법률적인 판단과 무관하게 사건 전후로 그가 김재규와 가까운 거리에 있었던데다, 이후 김재규와 함께 육군본부 B2 벙커로 이동하는 등의 석연찮은 행적은 의혹을 남겼다.

합동수사본부 문건을 보면 수사관들은 이런 부분과 함께 정 총장이 김재규의 요구대로 병력을 통제하고 이동 지시를 내린 점 등을 집중적으로 추궁했다. 

정승화 피고인(전 육군참모총장겸 계엄사령관)이 1980년 3월 13일 계엄보통군법회의 내란방조 피의사건 선고공판에서 이마의 땀을 닦고 있다. 재판부는 징역 10년을 선고했으나 18일 형량 확인 과정에서 7년으로 감형됐다.



현장에 있었던 김계원(2016년 사망) 비서실장은 내란목적살인 및 내란 중요 임무 종사 미수 공모 혐의로 군법회의 1심에 이어 2심(1980.1.28)에서도 사형을 받았으나 곧바로 이희성 계엄사령관에 의해 무기로 감형했다. 1982년 형집행정지로 풀려난 그는 1988년에 특별사면 복권 됐다.


◇ 여전히 엇갈리는 평가

한국 현대사의 가장 극적인 사건으로 불리는 10·26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부모나 임금을 살해한다는 의미의 '시역'(弑逆·부모나 임금 살해)부터 '계획 살인', '우발적 단순 살인'으로 부르기도 한다.

또 일각에선 10·26이 결과론적으로 유신 체제를 무너뜨렸다는 점을 들어 정반대의 평가를 하거나 재평가를 주장하기도 한다.

이런 다양한 평가는 통찰의 결과라기보다는 다분히 평가자 개인의 성향이나 김재규와의 관계 등에 따라 좌우되는 경향이 짙다.

10·26 사건에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을 줄곧 변호한 강신옥 변호사가 2019년 10월 1일 연합뉴스와 인터뷰하는 모습. 그는 김재규 부장이 민주화 촉진 공로로 재평가되고 명예도 회복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재규의 1·2·3심 변호를 맡았던 강신옥 변호사(13대ㆍ14대 국회의원 역임)는 그를 단순한 대통령 시해범으로만 보지 않는다. 오히려 김재규의 대통령 시해로 유신이 철폐된 것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재평가를 주장한다.

김재규가 1심에서 사선 변호인 조력을 거부한 뒤 국선변호인을 맡았고 2·3심에선 사선 변호인단에도 참가한 안동일 변호사는 재판을 거치면서 김재규에 대한 생각을 바꿨다고 한다. 처음 김재규를 정치공작을 자행해 온 유신 독재의 주구이자 주군을 살해한 패륜아로 봤지만, 4차까지의 공판 과정에서 줄곧 논리정연하고 당당한 모습을 보면서 그를 다시 보게 됐다는 것이다.

안동일 변호사는 당시 군법회의재판과 관련, "법무감실에서 법정에 설치된 도청장치를 통해 재판 과정을 모니터링하면서 수시로 법무사에게 쪽지를 전달하는 등 지극히 불공정하게 이뤄졌다"고 말했다.



◇'우발적 사건' vs '계획적 거사'

10ㆍ26의 성격을 우발적인 사건으로 볼지 아니면 치밀하게 계획된 것으로 볼지에 대한 견해도 여전히 엇갈린다.

사건 발생 직후엔 김재규가 차지철과 다투다 충동적으로 총을 뽑았다는 추정이 설득력 있게 제기됐다.

김계원 비서실장도 검찰신문(제3차 공판 79.12.10)에서 10ㆍ26을 우발적 사건으로 추정했다. 김 부장의 평소 대통령에 대한 충성도가 고려됐고 만찬에서 정치 문제로 계속 수세에 몰리던 상황 등을 들어 '돌연적 결심'이라고 진단한 것이다.

미 중앙정보국(CIA) 한국지부장(1973∼1975)을 지낸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 대사(1989∼1993)도 2011년 5월 한겨레신문과 인터뷰에서 김재규가 만찬장에 갈 때만 해도 살의(殺意)는 없었으며 "사건을 촉발한 건 차지철이었다(The triggering factor was Cha Jeechul)"면서 '격정에 의한 범죄(passion of crime)'로 추정했다. 조갑제닷컴의 조갑제 사장도 김재규가 거사 직후 지나칠 정도로 당황했던 점이나 권총 오작동으로 추가 격발되지 않은 점 등을 들어 '우발적 행동'에 무게를 뒀다.




반면, 안동일 변호사는 김재규가 낸 항소이유서 내용을 토대로 계획된 거사가 확실하다고 주장했다. 김재규는 안 변호사에게 10·26 이전에도 서너 차례 대통령 시해 준비를 했지만 결행하지 못했다고 털어놓았다는 것이다.

강신옥 변호사도 "우발적 거사가 아니라 오랫동안 구상해오다 그날 전격적으로 단행한 것" 같다고 했다. 그는 김재규에게 "박선호 의전과장에게조차 끝까지 숨긴 이유가 무언가"라고 묻자 "보안 때문에 그랬다. 정승화도 내게 속아 궁정동 식당에 왔다"고 답했다고 전했다.

당시 보안사령관 비서실장이던 허화평 미래한국재단 이사장(14·15대 의원)도 최근 한 인터뷰에서 "우발적 범행은 절대로 아니다"고 했다. 김재규가 보안사령관 때 수사과장으로 재직했던 이학봉 합수부 수사국장에게 사후에 '3단계 혁명계획'을 털어놓았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전두환 회고록 1 혼돈의 시대』에도 이런 내용이 나온다. 11월 6일 이학봉 국장이 김재규를 찾아가 "무슨 생각으로 엄청난 일을 저지른 겁니까?"라고 묻자 김재규는 '3단계 혁명계획'을 털어놓았다는 것이다. 소요 확산으로 민심이 떠난 상황에서 대통령을 죽이고 혁명 성공을 위해 정 총장을 사건에 끌어들이는 것이 1단계, 정 총장을 통해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계엄군을 서울에 진주시키는 동시에 국가 주요 기관을 점거하고 국가통치 기능과 권력을 장악하는 2단계, 혁명 선포 후 계엄사령부를 혁명위원회로 개편하고 의장 자리에 본인이 앉는 3단계의 전략을 짰었다는 설명이다.

윌리엄 글라이스틴 주한 미국대사는 10·26 사건 후 김재규와 미국 CIA와의 공모설이 서울 시내를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퍼져 한동안 고충이 따를 수도 있다는 내용의 전문을 보냈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별도 문건을 통해 자신이 김재규 부장을 몇 차례 만나 인권 문제 등에 대해 강도 높게 한국 정부를 비난한 바 있으나 10·26사건은 미국과 무관하다고 강조했다. 



허 이사장은 "김재규는 합수부 조사 때는 (범행을) 자책하는 모습도 보였지만 그를 민주 투사로 생각하는 변호인단이 구성돼 활동하면서 법정에서 수차례 진술(자필 진술서나 조사 과정의 발언)을 바꿨다"고 말했다.

그는 김재규·김계원·정승화 등 3인이 '궁중암살 공모'를 했다고 주장하면서, 그 근거로 이들 모두가 노재현 국방부 장관에게 박 대통령 서거 사실 등에 대해 허위 보고를 한 점을 들었다. 김 실장과 정 총장이 김재규의 요구로 경호실과 수경사, 9공수 병력출동을 지시하면서 장관에게는 보고하지 않은 점도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라고 허 이사장은 강조했다.

한편, 사건 직후 시중에는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사건에 개입했다는 소문이 광범위하게 퍼졌다. 이와 관련, 윌리엄 글라이스틴 주한 미국 대사는 그해 11월 19일 자 전문에서 "한국의 진보나 보수 등 이런 견해를 가진 정치적 스펙트럼이 존재한다. 이로 인해 당분간 우리 직원들의 삶이 고달플 수도 있게 됐다

(Suspicion of U.S. complicity in the death of President Park persists in Korea…(중략)…)"고 썼다.

 

1979년 12월 20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 관련자 김재규(전 중앙정보부장) 피고인이 육군본부 계엄 보통군법회의(재판장 김영선 중장)에서 선고공판을 받기 위해 포승에 묶여 걸어오며 웃고 있다. 당시 김재규, 김계원, 박선호, 박흥주, 이기주, 유성옥, 김태원 등 7명이 내란목적살인죄가 적용돼 사형을 선고 받았다.

 

10.26은 김재규의 배신, 권력 찬탈 야망, 미국 개입설 등의 수많은 미스터리를 역사에 남겼다. 김재규는 최종판결 전 자신의 혁명 정당성을 강하게 주장했지만 1980년 1월 28일 육군 고등계엄군법회의에서 "내란목적살인 및 내란미수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그해  5월 24일  서울구치소에서 사형 집행되었다. 사진은 김재규가 긴장한 채 형장으로 끌려가는 모습.

 

미국 개입설의 몇 가지 정황도 있다. 10.26 사태 며칠 전 김재규는 로버트 브루스터 CIA 한국지부장을 면담했다. 이 일로 미국이 박정희의 죽음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김재규는 군사재판에서 사상 최악에 이른 한미관계의 개선을 자신의 거사의 한 이유로 들었지만 미국의 직접적인 개입은 부정했다. 주한미국대사 글라이스틴은 김재규의 한미관계 발언을 '쓰레기 같은 소리'라면서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지난 2011년 1월 18일에는, 한 재미 동포에 의해 김재규에 관한 미국의 당시 비밀문서가 모두 비공개 처리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저격하던 당일 오후 2시에 글라이스틴 주한미국대사를 만난 사실이 뒤늦게 드러나서 김재규의 박정희 암살에 대한 의문과 관심이 한층 더 높아지기도 했다. 

 

김재규가 오랫동안 미국 CIA와 국가안보 및 정보수집을 매개로 접촉을 하면서 친분을 쌓았던 것은 사실이다. 그런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미국 CIA와 '동화' 되는 과정을 거쳤을 수 있다. 이는 옛날 정당을 출입하던 정보관계자들이나, 당 출입을 하는 정치부기자들이 그들과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는 당의 입장과 이익에 동화되는 과정과 비슷한 경우일 수 있다. 김재규 또한 때때로 한국보다 미국의 입장과 사정까지 고려해야만 하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을 것이다. 어쨌든 그는 박정희와 미국의 최고위 비밀통로였기 때문에 양쪽의 입장을 조율 관리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과정에서 그가 어느 한쪽의 판단을 따를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미묘한 국제정세와 개인의 응어리진 소신이 상승작용을 일으켰을 수 있다.

 

김재규는 박정희 가문 최악의 패륜아였을 수도, 유신을 절명시킨 혁명가였을 수도, 미국의 보이지 않는 사주를 받은 스파이였을 수도 있다. 역사적 팩트는, 그가 당긴 몇 발의 총탄으로 인해 수많은 국민들이 또 다른 총탄에 스러져가는 '킬링필드'만은 막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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