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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기노의 정치 피처링
과잉의 시대 결핍의 시대 본문
와이프가 며칠 전부터 ‘나 5월 1일에 혼자 TV 볼 테니 절대 건들지 말라’는 사전경고를 날려서 의아해했다. 뭐 그리 대단한 프로그램이 있다고 저 난리를 피우는지, 생각했다. 그리고 드디어 그 날이 왔다. 하이네켄 ‘라지’를 한캔 떡 갖다 놓더니 ‘절대 방해하지 말라’며 쇼파에 앉는다. 딸이랑 나는 그 엄포에 밀려 다른 곳에서 조용히 각자의 일을 했다.
도대체 무슨 방송이기에 저렇게 결연하고 엄숙한 표정으로 앉아서 기다릴까. 문제의 그 프로그램은 바로 올해로 55회를 맞는 ‘백상 예술대상’이었다. 레드카펫 시간부터 TV에 빨려들어 갈듯이 집중하던 와이프에게 말조차 걸 수 없었다. 연유는 간단했다. 주지훈이라는 배우에 빠져서 흔히 말하는 ‘사생’ 수준은 아니지만 트위터로 온갖 정보를 수집하고, 나를 반 협박해 그가 출연한 ‘공작’ DVD 한정판을 주문해달라고 아주 당당하게 요구할 때, 늘그막에 얼마나 소일거리가 없으면 한 배우에 빠져서 저러나 싶어서, 얼른 그 요구를 들어주었다.
그리고 프로그램이 끝나갈 무렵, 프로야구 하이라이트나 보려고 백상 예술대상이 끝날 무렵 우리 둘은 쇼파에 같이 앉아서 그 프로그램을 보기 시작했다. 평소 연말에 상을 남발하는 한국의 시상문화를 마뜩찮게 여기고 있던 터라 시큰둥한 표정으로 프로그램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카메라가 참석한 스타배우들을 한번씩 쭉 훑고 지나갈 때 눈에 띄는 배우 한명이 있었다.
김혜자. ‘국민엄마’로 칭송받는 대 배우였다. 오랜만에 브라운관에서 보니 친근감도 느껴졌지만, 왠지 그 젊고 아름다운 배우들 속에서 주눅든 노배우의 모습이 내게는 조금 어색하게 다가왔다. 더구나 호명될 때마다 다른 배우들이 그 상을 휩쓸어가게 되는 것을 보면서, 조금은 아쉬운 표정으로 수상자들을 축하해주는 김혜자씨의 모습에서 좀 측은한 생각도 들었다.
그런 기분을 느낀 건 나도 이제 ‘나이’가 들어서일 것이라고 지금 생각해본다(저보다 더 많이 나이 드신 분께 심히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50줄을 넘어 어디 모임에라도 가면 왠지 자리가 불편해질 때가 있다. 며칠 전 한 모임에서는 나보다 두 살 적은 ‘애’가 제일 막내였다. 원래는 20대부터 50대까지 다양한 나이대 모임이었으나 몇 년이 지나면서 ‘젊은 친구’들은 하나둘씩 보이지 않게 되었고, 결국 ‘나이든 우리’만 열혈 참석자가 되었다.
한 동문회 모임도 마찬가지다. 한번씩 가보면 나보다 나이많은 선배들이 나를 귀여운 동생으로 대해줘서 기분은 좋지만, 모임 끝무렵에 ‘이제 좀 젊은 친구들도 영입하자’는 회장님의 모기소리만한 불평을 들을 때는, 내가 왠지 미안해질 때가 있다. 한 10년만 다시 나이를 돌리고 싶을 정도로, 그 귀엽고도 작은 불평은 내가 나이듦에 익숙해지기보다 그 눈치를 봐야 되는 형언할 수 없는 미안함 같은 걸 가지게 만들었다.
김혜자 대배우가 ‘젊은’ 배우들 속에 앉아 있는 걸 보면서, 그의 호명이 차례로 건너뛰게 되면서, 나는 마치 내가 그 자리에 앉아있는 것 같은 동질감을 느꼈다. 나보다 나이 많은 선배에게 귀요미 멘트를 시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내가 그 나이만 많아지는 모임의 구성원이란 게 좀 어색하고 불편하게 느꼈던 것처럼, 김혜자씨도 그런 마음이 들지는 않았는지 적잖이 걱정도 됐다. 애써 웃는 표정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김혜자씨가 더 측은해보였다.
야구가 보고 싶어서가 아니라 내가 괜히 그 불편한 자리에 있는 것처럼 얼굴이 화끈거리면서, 빨리 그 시상식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김혜자씨가 호명이 되었다. 그것도 마지막에 가장 큰 상인 ‘백상 예술대상’을 수상한 것이다. 나는 극적인 반전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무엇보다 그 어색한 자리에서 당당하고 떳떳하게 큰 상을 수상하는 김혜자씨의 저력과 열정을 느낄 수 있어 좋았다. 나이든 사람이라서 상을 주는 게 아니라 젊은 배우들과의 경쟁에서 당당하게 실력을 인정받은 게 고마웠다.
그리고 긴장하고 당황한 모습으로 기분 좋게 불려나온 김혜자의 수상소감이 결국 내 눈가를 적시게 했음을 고백한다. 평소 무대나 사람들 많은 자리에서 말을 잘 못하는 나로서는, 수상자들이 공개소감을 말할 때마다 내가 더 떨림을 느낀다. 얼마나 긴장하면 하고 싶은 말의 반의 반의 반도 못하고 서둘러 저 자리를 떠날까. 얼마나 힘들었으면 발성연습이 생활화된 배우들도 저렇게 목소리가 떨리는 걸까. 김혜자씨도 떨고 있었다. KBS 공채 1기로 무려 56년동안 배우생활을 해온 김혜자씨도 기대하지 않은 상을 받은 뒤 수상소감을 말할 때 떨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떨림이 나를 되돌아보게 했다. 김혜자씨는 ‘이제 이런 상도 젊은 배우들이 받고 우리는 좀 양보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겸양의 미덕을 평소에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그 대상이 자신의 것은 아니라는 듯 보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수상소감을 준비해왔다고 했다. 그것은 나이가 들어 아무리 외워도 외워지지 않던 드라마 속 나레이션이었다. 그는 대본을 찢어와서 떨리는 목소리로 그 대사를 읽기 시작했다. 나는 초몰입으로 김혜자씨의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때론 불행했고 행복했습니다. 삶이 한낱 꿈에 불과했다지만 그래도 살아서 좋았습니다. 새벽의 쨍한 차가운 공기. 꽃이 피기 전 부는 달큰한 바람. 해 질 무렵 우러나오는 노을의 냄새. 어느 한가지 눈부시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지금 삶이 힘든 당신.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당신은 이 모든 걸 매일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후회만 가득한 과거와 불안하기만 한 미래 때문에 지금을 망치지 마세요. 오늘을 살아가세요. 눈이 부시게."
김혜자씨는 이어 "누군가의 엄마, 누이, 딸이었고 그리고 나였을 그대들에게 이 말을 꼭 하고싶었어요"라고 소감을 마무리했다.
와이프는 주지훈이 결국 백상 예술대상에 나오지 않았다며, 아마 킹덤 드라마 촬영 때문에 바빠서 오지 않았을 것이라며, 시큰둥한 표정으로 수상식 소감을 말하고 있었다. 나는 그의 실망스러움을 해소해주기 위해 고개를 주억거려 주었지만, 실제로는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감추기위해서였다. ‘또 우냐’는 말을 듣기 싫기도 했지만, 나이 들어서 주책이라는 고급진 한국말로 나를 책망하는 ‘마누라’의 눈치 없는 타박이 싫기도 해서였다.
걸그룹에 데뷔라도 하려면 마치 나이경쟁이라도 하듯 갈수록 입문 시기가 빨라지고 있다. 기업의 부장 정도만 되면 회식모임 가는 걸 ‘스스로’ 꺼리게 되는 것 같다. 젊음이 좋은 것이지만, 한 살이라도 어린 것이 마치 자랑이거나 훈장이라도 되는 것처럼 우리는 젊음의 과잉 시대에 살고 있다. 그 시리디 시린 푸른 청춘을 질투하는 게 아니다. 나이에는 그것에 걸맞은 색깔과 향기가 있을 것이다.
조금만 나이가 들면 뒷방으로 밀려나는 우리는 공존과 공감의 결핍 시대에 살고 있다. 세대가 함께 어울려 나이많음도 다양한 경험과 배려로 존경받는 세상이면 더 좋겠다. 김혜자씨가 이날 상을 받지 못했더라도 그 존재하고 있음에 감사하는 젊은 배우들의 따뜻한 시선과 배려가 있었으면 더 좋겠다(물론 당연히 그랬을 것이다). ‘노인’들도 푸른 청춘들을 앉혀놓고 가르치기보다는 그들의 생각과 감정을 읽어내고 이해하려는 마음이 있으면 더 좋겠다.
우리는, 나이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새벽의 쨍한 차가운 공기, 꽃이 피기 전 부는 달큰한 바람, 해 질 무렵 우러나오는 노을의 냄새, 어느 한가지 눈부시지 않은 날이 없는 이 최고의 인생을 각자 누릴 자격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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