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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기노의 정치 피처링
문재인 대통령님, 공약 후퇴도 '관행'입니까? 본문
다음은 정치전문 인터넷신문 '피처링'에 게재된 기사 전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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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부의 성패는 새 정부의 인수위원회 역할을 하고 있는 국정기획자문위원회의 ‘숙제 계획서’에서 결판이 난다. 통상 정부 출범 뒤 100일만에 인수위(국정위)의 로드맵이 본 궤도에 오르지 않으면 그 개혁 작업은 실패로 끝난 것으로 간주된다. 노무현 정권 때 검찰 개혁을 외치며 ‘검사와의 대화’ 같은 ‘이벤트’도 국정개혁 과제를 초반에 결판내기 위한 노 대통령의 야심작이었다. 하지만 실패였다. 대화 당일 날 검사들은 노무현 대통령의 ‘청탁’ 사실 등을 정면으로 거론하며 본질을 희석시키는 훼방꾼 역할을 자임했다. 정권이 바뀌어도 기득권의 저항은 상상을 초월한다. 웬만한 의지와 구체적인 개혁 로드맵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런 상황에서 문재인 정부의 개혁 프론티어 역할을 할 국정기획자문위원회의 정부부처 업무보고가 드디어 끝났다. 이제부터는 그 보고를 토대로 본격적인 국정과제 수립에 나서게 된다. 김진표 위원장은 업무보고 과정에서 각 부처의 보고 내용에 대해 “대체로 기존 정책에 ‘표지 갈이’가 눈에 많이 띈다. 과거에 잘못된 행정 관행에 대해 자기 반성을 토대로 바꾸려는 진정성이 있어야 하는데 잘 안 느껴졌다”고 쏘아붙였다. 김 위원장의 지적에 관가도 바짝 긴장하는 눈치다. 보고서 만들기야 공무원들 주특기이지만 기존 내용을 ‘재가공’하는 게 눈에 두드러지자 관료출신 김진표 위원장이 ‘그만 베끼라’며 점잖게 지적한 것 같다.
하지만 이같은 ‘지적질’에 대해 현 정부도 할 말이 있을까 싶다. 김성조 공정거래위원장 후보자의 인사청문회가 열리던 지난 6월 2일, 바른정당 유의동 의원이 질의를 했다. 그는 청와대가 김 후보자를 왜 추천했는지, 그 내용이 적힌 인사청문요청서를 읽어내려갔다.
“공정거래법 제도와 경제정책에 대한 전문성과 함께 그간 보여준 탁월한 리더십을 바탕으로 중소기업 등 경제적 약자 및 소비자 보호 강화, 담합으로 인한 국민 피해 예방 및 구제, 대기업 집단 폐해 시정 등 시장경제 파수꾼으로서의 원칙과 기본에 충실을 기여하여 기업의 창의 혁신을 통한 경제 재도약이라는 국정과제를 추진해 나가야 할 공정거래위원장의 역할 수행의 적임자로 평가되므로 인사청문을 요청합니다."
유 의원은 이어 또 다른 인사청문요청서를 화면에 띄웠다. 직전의 내용과는 단어 두 개만 다를 뿐 글자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박근혜 전 대통령이 현 공정위원장인 정재찬 위원장을 추천하기 위한 인사청문요청서였던 것이다. 김상조 후보자는 자신을 연신 띄워준 유 의원이 갑자기 박근혜 전 대통령의 인사청문요청서와 단어 두 개만 차이날 뿐 똑같다는 것을 알게 되자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에 유 의원은 “저는 김상조 후보자의 인사청문요청서 어디에서도 후보자께서 공정거래 전문가라는 진정성 담긴 표현을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문재인 정부가 출범을 하고 공정거래위 위원장을 그 어느 곳보다도 이르게 지명한 이유가 공정위의 역할을 그 어느 때보다도 중시하고 기대를 하고 있다고 해석을 합니다. 맞습니까?”라고 물었다.
물론 공정위원장이란 자리가 정권이 바뀌었다고 해서 그 역할이 하늘과 땅처럼 차이가 나지는 않는다. 인사청문요청서도 요식행위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것을 제대로 읽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유의동 의원은 황금같은 질의 시간에 그 내용 전체를 읽으며 전 정권과 새 정권에 있어서 공정위원장의 차이점이 뭔지 따졌다. 유 의원은 성의 없고 부실한 인사청문요청서를 받아들고 더 꼼꼼하게 질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필자는 인사청문회를 지켜보면서 김상조 후보자의 20여년 시민운동 경력이나 ‘공정’에 관한 확고한 지식과 철학 등을 볼 때 역대 레전드급의 위원장이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하지만 이번 정권, 특히 청와대나 국정위의 초반 대응 능력이나 준비 자세를 보면 ‘전 정권과 별 차이가 없다’라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청와대에서야 형식적으로 인사청문요청서를 보냈겠지만, 어떻게 그것이 그들이 그토록 무능력하다며 내쫓아내는 데 일조했던 ‘박근혜의 요청서’를 그대로 베끼는 것인가 말이다.
정권 출범 초반, 인수위도 없이 부랴부랴 새 정부를 준비하다 보면 물론 경황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국정위가 인수위 역할을 하며 충분하게 검토 작업을 하고 있다. ‘인수위가 없다’는 변명도 궁색하게 들린다. 전 정권이 추진했던 거의 모든 사업이나 정책이 ‘무능력’이라는 이름 아래 지금 재편되거나 없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그것들을 ‘처분’하는 능력자들은 깔끔하게 일처리를 해야 하지 않을까.
국정위의 ‘역할’에 대해서도 뒷말이 나온다. 국정위는 부처별로 보고를 받으면서 문재인 대통령이 공약했던 일부 핵심 정책을 ‘없던 일’이거나 ‘재검토’ 대상에 올려놓고 있다. 전 정권은 적폐이기 때문에 청산해야 하지만, 현 정권이 하면 ‘관행’이었거나 상황론을 들이민다. 몇 가지만 소개해 보겠다.
“(지난 정부에서 통상 부분을) 외교부에서 떼 내서 산자부에 보낸 것은 저는 잘못된 결정이었다고 생각하고, 다시 외교부로 복원하는 것이 맞겠다고 봅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대선 전 공개했던 공약 가운데 하나다. 국정기획위도 지난달 24일, 정부조직 개편안을 통해 산자부의 통상교섭 기능을 외교부로 이관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열흘도 채 안 돼 없던 일이 됐다. “한·미 FTA 재협상 같은 현안이 산적해 주무 부처를 바꾸는 게 쉽지 않아서”라는 설명이 나왔다. “통상기능은 산업 쪽에 붙이는 게 추세”라는 주장도 돌았다.
정치권에서는 정부가 이 문제를 업무조정면에서 접근한 게 아니라 조직개편과 관련해 해결하다 보니 공약이 후퇴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라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산자부의 통상기능을 외교부로 옮기면, 산자부엔 에너지 관련 조직 등 일부 부처만 남게 된다. 위상이 크게 떨어진다. 이렇게 되면 미래창조과학부와의 통합 등을 고민해야 하는데, 연쇄 조직 개편이 시작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국정기획위는 이런 문제가 발생할 것을 우려해 애초 공약을 번복한 걸로 알려진다. 업무의 효율성을 따지는 게 우선이다. 부처 조직 개편이 무서워 업무 효율성이 떨어지는 시스템을 그대로 두는 것도 옳지 못한 일이다.
대통령 경호실을 폐지하겠다는 공약도 보류됐다. 이 내용은 문재인 대통령의 광화문 집무실 이전공약과 맞물려 대선 때부터 관심의 대상이었다. 집무실 이전을 주도하고 있는 ‘광화문 대통령 기획위원회’는 올해 집무실 이전 계획을 세우고 내년에 예산을 확보해, 2019년쯤 광화문 대통령 시대를 열겠다고 밝혔다. 경호기능 역시 경찰청 산하의 경호국으로 옮기고 권위의 상징이 된 지금의 경호실은 없애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지난 6월 1일 국정기획위의 결정과 함께 이런 ‘그랜드 플랜’은 무기한 연기됐다. 국정기획위는 “위원회에서 대통령 집무실 옮기는 것까지 논의하는 것은 어렵다”는 입장을 밝혔다. 국정기획위에서 이 문제가 다뤄지지 않으면 현실적으로 추진하는 것이 어려운 것 아니냐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이는 현실적으로 대안이 별로 없었다는 점에서 일견 이해가 되는 대목이다. 대통령 집무실을 광화문으로 옮기는 게 제약이 큰 상황에서 경호 수위만 낮출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10일 취임선서를 통해 “권위적인 대통령 문화를 청산하겠다. 준비를 마치는 대로 지금의 청와대에서 나와 광화문 대통령시대를 열겠다”“고 밝혔다. 권좌에서 내려와 소탈한 행보를 보이겠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문재인 정부의 상징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문재인 정부의 ‘광화문 대통령’ 공약 후퇴 가능성은 아쉬움이 남는다.
문재인 대통령은 후보시절 신규 원전 건설을 중단하고 설계 수명이 다한 원전은 바로 폐쇄하겠다고 밝혔다. 대선 공약 홈페이지인 ‘문재인 1번가’에서 가장 많은 지지를 받은 공약이기도 하다. 공약대로라면 현재 운영 중이거나 건설 중인 원전의 폐쇄 또는 건설 중단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한국수력원자력은 이달 착공을 앞두고 있던 경북 울진의 신한울 원전 3, 4호기의 종합설계용역을 잠정 중단했다고 밝혔다. 또 부산 기장군의 신고리 5, 6호 원전 건설 중단과 노후원전인 월성 1호기 폐쇄도 적극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하지만 국정기획위는 원전 정책 재검토를 슬그머니 꺼낼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일부 보수언론과 학자들이 ‘원전 없이는 에너지 자립도 어림없다’는 논리로 거세게 저항하자 주춤하는 모양새다. 특히 신고리 원전 5·6호기 공사 중단을 놓고는 국정기획위 내부에서조차 혼란스러운 분위기다. 신고리 5·6호기 건설의 총 사업비는 8조 6천억 원으로, 현재까지 1조 5천 2백억 원이 투입됐다. 공사가 중단될 경우 막대한 파장이 불가피하다는 점에서, 국정기획위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관심이 집중됐다.
지난 2일, 관련 업무보고가 열렸다. 하지만 국정기획위는 혼란을 자처했다는 비난만 들었다. 천문학적인 비용이 걸린 민감한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김진표 국정기획위원장 등의 발언이 애매했기 때문입니다. 여러 차례 해석의 여지가 있는 브리핑이 오간 끝에 “공사 중단 여부를 충분히 종합적으로 검토하겠다”는 수준에서 상황은 정리됐다. 탈 원전이라는 방침은 그대로 가져가되, 원전 숫자를 차츰차츰 줄여나가자는 쪽으로 국정기획위 내부 의견이 모아진 것으로 전해진다.
국정기획위는 6월 5일부터 5대 국정목표, 20대 국정전략, 100대 국정과제를 정리해 국민 앞에 내놓겠다고 밝혔다. 국정과제를 만드는 작업에 본격 착수하는 것이다. 사실 대선 때 내놓았던 공약은 말 그대로 ‘공약’(空約)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설익은 정책에다 기대수준도 한껏 높인 ‘뻥튀기’일 가능성이 크다. 어찌 보면 그런 헛된 공약들을 현실성 있는 정책들로 탈바꿈시키는 게 더 나은 선택이 될 수도 있겠다. 여의도 속설에 ‘공약은 공약일 뿐 너무 믿지 말자’는 말도 있다. 이런 관용과 너그러움이 지금까지의 정치권 ‘관행’이었다. 김상조 공정위원장 후보자가 그토록 주장하던 ‘관행’ 말이다.
지금 문재인 대통령은 집권 초 80%가 넘는 압도적인 국민들의 지지를 받는 소통의 화신과도 같은 권력수반이다. 그의 취임 일성은 ‘적폐청산’이었다. 정치권이 그동안 공약을 후퇴시키거나 없는 것처럼 무시해도 그냥 넘어가며 ‘관행’으로 치부해왔지만 문재인 대통령만은 달라졌으면 어떨까 한다. 언젠가 한번은 끊어야 할 것이 관행이자 적폐다. 문재인 대통령이 성공한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는 이것들을 반드시 본인의 임기 때부터 끊어내야 한다. 압도적인 지지율로 정치적 환경도 좋은 편이다. 야당도 국민 눈치를 보면서 함부로 못하고 있다. 이럴 때 진정한 적폐청산과 관행타파의 모습을 기대해 본다. 하지만 국정기획위의 말 바꾸기나 청와대의 ‘관행 인사청문요청서’를 보면서 요란한 수레 위의 원님이 나팔을 시끄럽게 불지나 않는지 좀 걱정스럽다.
성기노 피처링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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