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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기노의 정치 피처링
'제2차 세계대전의 기원' 일본군의 무능과 오만함이 드러났던 노몬한 사건을 아시나요? 본문
일본은 해마다 패망일인 8월 15일을 기념하는 식을 올린다. 그리고 NHK는 여러가지 역사 자료를 발굴하여 특별 다큐멘터리를 방영하곤 한다. 올해는 '노몬한, 책임이 없는 전쟁'이라는 스페셜 다큐를 방영했다.
2차대전 직전인 1939년 당시 만주는 일본 관동군(關東軍)이 장악하였는데, 노몬한 부근은 국경선이 확실하지 않아 가끔 분쟁이 일어났다. 1939년 5월 몽골군이 할하강(江)을 건너오자 일본군은 불법월경(不法越境)으로 간주해 충돌하였는데, 이때 몽골과 상호원조조약을 맺은 소련이 기계화 부대를 투입하여 일본군을 전멸시켰다.
이에 일본은 만주에 주둔해 있던 항공 ·전차 병력을 총동원하여 대대적인 공세를 취하였으나, G.K.주코프 지휘하의 소련군 및 몽골군의 반격을 받아 참패, 사상자(死傷者)가 2만 명에 달하였다. 당시는 제2차 세계대전 직전으로, 양국은 서로 극동에서의 전쟁을 피하려 했기 때문에 그 해 9월 정전(停戰)협정이 성립되어 수개월에 걸친 국경분쟁은 일단락되었다. 이듬해 두 나라는 만주 ·몽골의 국경선을 대개 소련의 주장대로 확정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럼 좀 더 자세히 전쟁의 전말을 살펴보자.
1939년 5월11일 만몽(滿蒙) 국경 할힌골(Khalkhin Gol·노몬한). 몽골 인민공화국 기병대가 군마의 목초지를 찾아 개울을 건넜다. 몽골과 일본 제국주의의 괴뢰국가인 만주국 사이에 국경선이 확정되지 않았던 터였다. 영토 침범으로 간주한 만주국은 교전을 시작하는 한편 일본군을 불렀다. 급히 출동한 일본 관동군 23사단 수색대와 만주국 기병대, 몽골군 간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잇따랐다. 하늘에서도 공중전이 벌어졌다. 몽골과 상호 방위조약을 맺고 있던 소련군과 일본군 전투기가 맞붙었다.
싸움은 곧 전면전으로 번졌다. 소련과 일본은 9월 중순 정전협정을 맺기까지 4개월 동안 하늘과 땅에서 싸웠다. 결과는 병력과 장비에서 우세했던 소련의 완승. 소련과 몽골군은 7만3,000여 병력에 전차 550대, 장갑차 450대, 야포 500문, 트럭 4,000대에 항공기 900대 이상을 투입해 일본과 만주국을 압도했다. 일본 측은 병력 3만8,000명, 전차 73대, 장갑차 64대, 야포 300문, 트럭 1,000대, 항공기 400대로 약세였다. 만주국 기병대가 주로 운용한 군마의 수만 2,708필로 1,921필을 동원한 몽골군을 앞섰을 뿐이다.
소련군은 장비의 양은 물론 질에서도 일본군보다 훨씬 뛰어났다. 열세에 처한 일본군의 선택은 육탄 돌격. 일본군 지휘관들은 총을 맞고도 끄떡없는 장갑차를 향해 총검술로 맞서라고 병사들을 다그쳤다. 한때 한국을 연상시키는 상징물이었던 화염병이 본격 등장한 것도 이때부터다. 우세한 화력과 기동력을 갖춘 적이라도 정신력으로 맞설 수 있다고 자신했던 일본군은 처절하게 깨졌다. 연대장 3명을 포함해 8,440명 사망, 8,766명 부상. 사상자가 3만명에 달했다는 주장도 있다.
소련군은 완승을 거뒀다. 훗날 밝혀진 자료에서는 일본군 못지않은 인명 피해를 입은 것으로 드러났지만 소련 국민들은 러일 전쟁에서 패배한 악몽에서 벗어났다. 영웅도 탄생했다. 소련·몽골 연합군을 지휘한 주코프 장군이 2년 뒤 독일과 전쟁에서 소련군 총사령관으로 발탁된 것도 노몬한 전투에서 일본군을 격퇴해 국민과 군의 신망을 얻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일본은 패배를 감추는데 급급했다. 종전 협상에서도 소련이 원하는 대로 국경선을 그었다.
군단급 이상 규모의 장비와 병력이 동원되고 수많은 장병들이 희생됐어도 일본은 당시의 싸움을 아직도 애써 외면하고 있다. 전쟁 또는 전투로 기록되어야 할 당시의 싸움을 ‘노몬한 사건’으로만 기억하는 것도 패배를 감추기 위해서다. 참전했던 병사들에게 함구령이 떨어져 일본 국민들은 태평양전쟁이 끝나고서야 일본군이 소련군에 참패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노몬한 전투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역사를 갈랐다. 일본과 힘겹게 싸우던 중국은 우리도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다. 각국의 이해관계가 엇갈렸다.
영국의 전쟁사가 앤터니 비버는 역저 ‘제2차 세계대전’에서 노몬한 전투를 2차 세계대전의 기원으로 본다. 노몬한 전투에서 소련군 기계화 부대의 위력에 눌린 일본은 소련과 전쟁하자는 북진파가 힘을 잃었다. 대신 해군이 주도하는 남진파가 주도 세력으로 떠올랐다. 독일은 노몬한 전투가 끝나자마자 폴란드를 침공, 유럽 전역이 2차 대전으로 빨려 들어갔다. 소련과 다시 싸우고 싶지 않았던 일본은 1941년 히틀러의 소련 침공 직전 소련과 불가침 조약을 맺었다. 만약 일본이 승리했다면 히틀러의 희망대로 독일과 일본이 양쪽에서 소련을 치는 구도가 성립될 수도 있었다.
소련이 승리한 원동력은 경제력. 1920년대 중반 이후 초고속 성장한 경제를 기반으로 병력을 양성하고 탱크를 만들어 군대를 기계화했다. 노몬한 전투 당시 소련의 국내총생산(GDP)는 약 366억 달러. 일본(184억 달러)의 두 배였다. 승패는 총성이 울리기 전에 이미 결정돼 있었던 셈이다.
올해 NHK는 이 노몬한 사건을 재조명하는 다큐를 방영했다. 요지는 당시 무참한 패배를 당했던 전쟁의 책임이 어디에 있는지를 조명해보는 것이었다. 그당시 군 직제는 천황 밑에 도쿄의 참모본부 그리고 그 아래에 관동군으로 편제돼 있었다. 형식상 관동군이 도쿄 참모본부의 명령을 받는 구조였지만 실제로 관동군은 당시 막강한 군사력으로 만주지방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도쿄 '본부'의 명령보다 막강한 관동군의 참모 조직의 자율성이 매우 강했다. 쓰지 마사노부 등 관동군 참모들은 소련군을 피해 포로가 되거나 '철퇴'(후퇴)를 했던 군인들에게 자살을 강요해 논란을 빚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과연 노몬한 패배의 책임이 어디에 있는지가 역사적으로 큰 논란이 됐다. 도쿄 참모본부는 관동군에게 책임이 있다고 하고, 관동군은 지휘체계상 도쿄 참모본부에 책임이 있다며 서로 책임을 떠넘기고 있었다.
이 논쟁이 현재에 와서도 논란과 관심의 배경이 되는 것은, 일본은 상하 위계질서가 가장 확실한 사회다. 그럼에도 회사나 조직에 무슨 사건이 발생했을 때 그 최종적 책임이 모호해질 때가 있다고 한다. 서양의 경우는 각 단계마다 책임의 성격이 명확한 데 반해 일본은 그 경계성이 모호할 때가 많다고 한다.
서양은 명령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차례로 내려와 그 책임단계가 분명하지만, 일본은 집단주의 성격이 강해 아래에서부터 위로 올라가며 구성원 전체가 명령을 공유하고 누가 책임을 확실히 지는가에 대한 의식이 불분명하고 모호한 편이다. 이런 문제는 지금도 일본 조직문화의 큰 문제로 자리잡고 있다고 한다. 일본 NHK가 노모한 사건의 책임자를 규명하는 역사 다큐를 방영하면서도 현재에도 이런 책임소재 문제가 여전히 있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의도도 엿보인다.
노몬한 사건으로 소련에 호되게 당한 일본 강경파들은 미국·영국과 맞서는 남방정책을 추진하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고, 그것이 태평양전쟁의 발단이었다. 윗동네를 기웃댔다가 크게 혼난 조직폭력배가 아랫동네를 노리는 식으로 나라의 운명이 흘러가는 이상한 시대였다. 아마 일본이 노몬한 사건으로 소련에 크게 승리했다면 2차 세계대전은 다른 식으로 흘러갔을지도 모른다. 역사에는 가정은 없다. 분명한 것은, 일본은 자기 나라를 벗어나 만주벌판을 호령하며 세계를 탐할 수준에까지 올랐던 것에 비해 조선은 제 나라도 지키지 못하고 식민지의 피폐한 삶을 살고 있었다는 것이다. 역사는 돌고 돈다. 우리는 지금 어디쯤 와 있을까.
성기노 피처링 대표(www.featuri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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