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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5촌 조카 살인사건 취재 후기

성기노피처링대표 2016. 12. 25. 2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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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5촌 살인 사건을 둘러싸고 의혹과 공포가 교차하고 있다. 지난 2011년 9월 6일 박근혜 대통령의 5촌인 박용철 씨(당시 49세)가 북한산 등산로에서 흉기에 피살된 시신으로 발견된 사건을 말한다. 당시 피의자는 같이 있던 박 대통령의 또 다른 5촌 박용수 씨(당시 51세)였고 그는 흉기 등으로 박용철씨를 무참하게 살해한 뒤 산으로 들어가 목을 매 자살을 한 것으로 경찰 수사결과는 종료됐다.




하지만 사건 당시 석연치 않은 의혹이 많이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언론사 등의 취재가 제대로 이어지지 않았고 사건은 그대로 묻히는 듯했다. 하지만 최근 SBS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당시 밝혀지지 않은 의혹을 재조명하면서 5년 동안 북한산 자락에 묻혀있던 진실의 실타래가 조금씩 풀릴지 세간의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다. 


사실 기자는 사건이 일어날 당시 일요신문 정치팀장을 맡고 있었는데, ‘박근혜와 그 일가’에 대해 2007년 대선 후보 경선 이후로 쭉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 당시 이명박-박근혜의 대권 경쟁은 상당히 치열했다. 예선만 통과하면 본선은 떼논 당상이었기 때문에 양측은 진흙탕 네거티브 공방을 벌이고 있었다. 기자도 두 캠프 간의 네거티브 공방을 깊숙이 취재했다. 


특히 이명박 캠프에서는 박근혜 후보 검증을 위한 일종의 특별팀을 만들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그들은 주로 육영재단 형제 갈등이나 최태민 목사 등 박근혜 후보가 예민하게 반응하는 민감한 사안을 철저하게 검증하려고 했다. 그게 박근혜 후보의 아킬레스건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명박 캠프는 육영재단 전직 간부 직원들 가운데 반 박근혜파 사람들을 주로 공략했다. 육영재단 소유권 문제로 시끄러울 때 반 박근혜파는 최태민 목사와 박근혜 후보간의 옛 추문들을 상당히 많이 확보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기자 또한 당시 전직 간부를 통해 최 목사와 박근혜 후보와의 관계, 최순실의 가계도(중앙정보부가 작성한 것으로 알려진), 최순실 집안 친인척들의 호적 등 기초적인 자료를 전부 입수할 수 있었다. 




특히 박근혜 후보와 최태민 목사와의 개인적 친분 관계도 진술 등을 토대로 구체적인 정황을 확보할 수 있었지만, 솔직히 당시 분위로서는 도저히 보도할 수 없었다. 이명박 캠프도 경선 룰 등을 두고 비교적 유리한 국면을 마련했기 때문에 굳이 그런 민감한 사안까지는 터뜨리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당시 네거티브 대응팀의 컨트롤 역할을 했던 정두언 전 의원이 최근 들어 박근혜-최태민 관계에 대해 ‘구체적으로 들으면 며칠 밥을 못 먹을 것이다’라든지, ‘19금 이야기도 있다’는 등의 이야기를 ‘자신있게’ 하는 것에는 기자가 판단해볼 때 충분히 그 근거가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다만, 당시 무리해서 그런 자료들을 터뜨리지 않고도 승리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이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당시 그런 자료들이 좀 드러나서 최순실 일가에 대한 스크린이 조금이라도 이뤄졌더라면 10여년 뒤 대통령 탄핵까지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기사 가운데 유일하게 터부 비슷하게 작용했던 것이 그와 최태민 목사 관련, 친인척 부분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을 취재하던 이른바 ‘친박’ 기자들에게는 그런 사안은 입에도 담을 수 없는 금기사항이었다. 자연히 박 대통령의 그런 민감한 사안은 일부 기자들만이 관심을 가지고 꾸준히 지켜보던 것이었다. 


그런 와중에 박근혜 5촌 살인사건 터졌고, 나는 즉시 팀원(이 기자는 박근령씨와도 친분이 깊었고 박근혜 대통령의 사생활도 꾸준히 취재했다)에게 취재를 하도록 지시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당시 언론은 이 문제를 거의 다루지 않았다. 검색을 해도 제대로 된 기사가 없었다. 후일담으로는 박근혜 가의 한 명이 이 사건의 보도를 일일이 체크하며 ‘감시’를 하고 있었다는 얘기도 들렸다. 박 대통령은 당시 한나라당의 유력한 대권 후보로서 대선을 1년 남짓 앞두고 떨어지는 낙엽도 피할 만큼 조심스런 행보를 하고 있을 때였다. 특히 형제들간의 갈등은 그가 느끼는 최고의 아킬레스건이었다. 사건과 간접적으로 연루된 박지만측도 이 사건을 상당히 주의깊게 보고 있었던 것 같다. 




박근혜 후보는 유독 자신의 가족사나 형제들간의 갈등, 최태민 등의 이야기만 나오면 모든 채널을 동원해 취재에 개입하거나 그 배경을 알려고 했다. 2007년 경선 이래 박근혜 일가를 취재한 기자는 박근혜 후보가 가족이나 최태민 문제는 결코 양보할 수 없는 문제로 여기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어쨌든, 당시 일요신문은 사건이 일어나고 1~2주만에 박근혜 5촌조카 피살.자살 전말이라는 제하로 보도를 했다(일요신문 제 1010호 2011년 9월 19일, 박근혜 5촌조카 피살·자살 전말 “살인 지시 미스터리도 함께 묻혔다”). 취재기자의 보고에 따르면 주변 취재가 너무 어렵다는 것이었다. 보통 이런 사건의 경우 피해자 주변 인물을 탐문하고 그것을 통해 경찰 수사에서 밝혀지지 않은 사안까지 한 걸음 더 들어가 보도를 하는 것이 주간지의 보도 패턴인데, 전혀 그렇게까지 진전이 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경찰 조사결과를 토대로 사건의 전말을 소개하는 정도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나로서는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는 보도였다. 반걸음도 제대로 들어가지 못한 리포팅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당시로서는 일요신문 취재가 그나마 그 사건을 보도한 몇 안 되는 매체 가운데 하나였다. 워낙 사건이 복잡한데다 유력 대선후보의 친인척 관련이었기 때문에 언론사 자체 스크린이 이뤄진 부분이 없잖아 있는 듯보인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보도가 나가고 1~2주가 지나자 박지만 EG 회장 측에서 '즉시' 내게로 연락이 왔다. 우리가 보도한 부분에 대해 고칠 것이 있다는 것이었다. 나로서는 황당했다. 리포팅이 말 그대로 경찰 조사결과를 거의 그대로 옮겨 쓴 것이었고, 그나마 주변인사들 몇 몇을 어렵게 섭외해 그 정황취재한 것을 쓴, 말 그대로 기초적인 보도였는데도 박지만측은 상당히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래서 나도 속으로 ‘역시 이것이 상당히 민감한 문제였구나’ 이렇게 느꼈다. 당시 취재기자나 팀장인 나로서도 ‘별 것도 아닌 리포팅인데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의아하게 생각을 하기도 했다.  




박지만 측 대리인인 모 변호사가 내게 전화로 연락을 해온 뒤 나는 그쪽이 요구하는 건을 이메일을 통해 협의를 했다. 당시 그쪽에서 문구 하나까지 상당히 세세하게 지적을 해 좀 지나치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해서 일요신문은 박지만 측 요구를 들어주며 ‘밝혀왔습니다’라는 제하의 반론보도문을 게재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지금 일요신문 온라인 기사 끝부분에 남아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다행히 당시 오고간 이메일을 찾을 수 있었다). 


지난 9월 25일자 ‘박근혜 5촌 조카 피살,자살’ 전말 기사에 대해 박지만 EG 회장측에서는 “박용수씨는 육영재단과 직.간접적인 관련이 없는 자이며, 박지만 회장이 박용철씨를 어린이회관 관장으로 내세운 사실이 없다”고 알려왔습니다. 또한 박용철씨는 9월 27일 신동욱 전 교수 재판에 증인으로 채택되지 않았고, 2010.9.1. 신 전 교수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하여 ’박지만 회장으로부터 신동욱 살해지시를 받은 적이 없으며, 녹취록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취지의 증언을 한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지금 돌이켜 보면 당시 수정했고 박지만측이 반론을 요구했던 부분은 현재 이 사건이 재조명되면서 일고 있는 핵심 의혹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 사건은 경찰의 수사가 종결된 사안이고 향후 재수사 여부도 불투명하다. 그럼에도 최근 SBS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다시 사건을 재조명하면서 세간의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다. 이 사건에 제 3자가 개입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2007년 7월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 당시, 기자도 최태민 목사와 최순실, 그 형제들, 그리고 박근혜 후보와의 관계 등에 대해 취재를 하면서 실로 말 못할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들었다. 하지만 당시 그 사실의 10%도 제대로 쓰지 못했다. 오래전 이야기들인 데다가 하나같이 민감한 소재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언론사의 분위기도 그러했다. 정치부 특성상 후보의 민감한 의혹들을 모조리 쓰기에는 분위기가 그렇지 못했다. 이래저래 아는 취재원들로 연결이 돼 있던 터라 그렇게까지 무리하게 쓸 수 없는 부분도 있었다. 박근혜 후보측이 상당히 격앙돼 제기했던 의혹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도 보도의 어려움 가운데 하나였다고 본다. 




그 뒤 2012년 박근혜 5촌 조카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박근혜 대통령과 박지만측은 유독 최태민 일가와의 갈등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언론보도에 상당히 민감하게 반응했던 측면이 있다. 그런 분위기 때문에 당시 사건도 그렇게 주목을 받지 못했을 수 있다. 하지만 최근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이 터지고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소추되는 극한 상황이 와서야 그 민감한 대응에 대한 이유 한 자락이 희미하게 보이는 것 같다. 


정치부 기자들은 사회부와 달리 날마다 만나다시피 하는 취재원의 민감한 사안을 쓰기가 쉽지 않다. 이럴 경우 그런 사안을 사회부 등으로 토스하는 경우도 있다. 그도 저도 아니면 조용히 취재수첩을 덮을 수밖에 없다. 정치부에서 유력 후보에게 찍히면 철저하게 그 세력으로부터 견제를 받는다. 이것이 무서워 기사를 완전히 쓰지 못했던 것은 아니지만, 정치부의 취재 패턴상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다. 그럼에도 돌이켜보면, 내가 만들어놓은 게이트키핑의 한계 때문에 제대로 된 감시자의 역할을 하지 못한 것은 아닌지 반성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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