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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기노 칼럼] 지귀연의 고매한 ‘감형 쇼’

성기노피처링대표 2026. 2. 20.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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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귀연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5부 재판장이 지난해 11월 5일 윤석열 전 대통령의 내란우두머리 사건 재판을 진행하고 있다. (사진=서울중앙지법 영상 캡처)

 

사법권은 국민이 위임한 권력이다. 법은 그 위임 위에 서 있다. 우리가 법관을 존중하는 이유도 개인에 대한 경외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합의한 법 정신에 대한 존중 때문이다. 하지만 판사들은 때때로 그런 사회적 합의와 존중을 개인에 대한 우러름으로 오도한다. 

또한 법관의 판결은 개인의 판단 취향이 아니라 시대정신과 역사의식이 담긴 공기(公器)여야 한다. 이런 점에서 지귀연 판사가 내놓은 윤석열 전 대통령 무기징역의 감형 사유는 상식을 고의적으로 비켜간 자기 과시이자 한겨울에 계엄군을 막아선 시민들에 대한 모욕이다.

 

지귀연은 내란 우두머리인 윤석열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하면서 내란이 “실패로 돌아갔다”는 점, 물리력 행사를 “자제시키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는 점을 감경 사유로 들었다. 그런데 더욱 황당한 것은 지귀연이 내놓은 세 가지 감경 사유다. 사형에 처할 수 있었지만 이 세 가지 이유 때문에 무기징역을 때렸다는 뜻이다. 지귀연이 언급한 감경 요소는 초범, 65세 고령, 장기간 공직 봉직이다.

사실 지귀연이 제시한 이런 사유들은 일반 형사법에서 주로 적용되는 원칙이긴 하다. 하지만 지귀연 말대로 어마어마한 사람들이 사회적 비용을 치르고 피해를 입은 비상계엄이라면 감경이 아니라 ‘특’가중처벌을 해도 모자랄 판이다.

그럼에도 지귀연은 기계적이고 관성적인 감경 접근법으로 판결을 대했다. 먼저 초범의 감형 사유다. 재판부는 피고인이 범죄 전력이 없는 초범이라는 점을 유리한 정황으로 꼽았다. 이에 대해 시민들은 경악을 금치 못한다.

“내란과 계엄이 무슨 경범죄냐? 인생에 두 번 할 수 있는 일인가?” “국가를 통째로 마비시키는 범죄를 저질렀는데 전과가 없으니 봐주자니... 그럼 첫 번째 살인은 무조건 감형인가?” 등의 비판이 쏟아진다. 이렇게 일반적인 형사 사건에서의 ‘초범’ 논리를 국가 헌정 질서를 파괴한 중대 범죄에 기계적으로 적용했다는 점은 지귀연이 이번 판결을 얼마나 안일하게 대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윤 전 대통령이 ‘비교적’ 고령(65세)이라는 점도 어처구니가 없는 사유다. 100세 시대다. 65세를 고령이라고 예우를 해주는 것 자체가 감형 사유를 억지로 찾기 위해 만든, 급조된 명분일 뿐이다. 특히 국가의 명운을 결정하는 자리에 있던 인물에게 ‘고령’이라는 딱지를 붙여 동정표를 던지는 행태는 국가원수의 책임감을 희화화하는 처사다.

마지막으로 제시된 장기간 공직에 봉직한 점은 실소를 금할 수 없다. 국민들의 세금으로 수십년 동안 공직을 맡았으면 그 은혜로 사회봉사를 해도 모자랄 판에 오히려 헌법을 짓밟고 국민들에게 집단 트라우마를 안긴 대통령의 행태가 법적으로 관대함을 보여줄 소재인가.

공직은 혜택이지 희생이 아니다. 국민은 그가 공직에 있었기에 더 엄격한 도덕성과 준법정신을 기대했다. 하지만 지귀연은 도리어 그 경력을 ‘면죄부’로 활용하며 공직의 본질을 ‘권력자들의 카르텔’로 전락시켰다.

지금 온라인에서 ‘초범 할인?’ ‘촉법 고령?’ ‘공직 할인?’ 등과 같은 조롱이 급속하게 퍼지고 있는 것은 지귀연의 판결에 대한 국민의 분노를 대변하는 것이다. 평범한 시민이 생계형 범죄를 저질렀을 때 판사들이 이토록 자애로운 태도로 수십 년의 성실한 노동을 감경 사유로 삼아준 적이 있었는지 되묻는 국민들이 많다.

지귀연 판사의 역사의식 부재도 도마 위에 오르고 있다. 이번 판결의 가장 큰 결함은 처참할 정도로 빈약한 역사의식이다. 지난 겨울 계엄군이 총칼을 들고 국회로 진입할 때 이를 몸으로 막아선 것은 판사님들의 법전이 아니라 시민들의 맨몸이었다. 그 고귀한 희생과 용기는 전 세계를 감동시켰고 우리 시민들은 노벨평화상 후보로 거론될 만큼 민주주의의 수호자로 각인됐다.

만약 그들이 목숨을 걸고 저항하지 않았다면 지금 우리는 어떤 세상을 살고 있을까. 아마 법치주의라는 말 자체가 사라진 암흑의 시대를 지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판결문 어디에도 그 역사의 주인공인 시민에 대한 예우나 언급은 보이지 않는다. 오직 윤석열 피고인에 대한 사법적 배려와 어떻게 해서든 감형을 해주겠다는 안쓰러운 기득권 카르텔의 몸부림만 부각됐다.

지귀연 판결문에서는 인문 감수성의 부재도 두드러진다. “영국 왕 찰스 1세도 주권을 침해해서 반역죄로 처형됐다”는 언급은 굳이 먼나라 역사를 한국 상황에 억지로 꿰맞추는 궤변이자 지적 허영 쇼의 하이라이트다. 특히 지귀연이 얼마나 인문학적 소양을 과시하고 싶어 하는지, 동시에 인간에 대한 보편적 통찰이 얼마나 결여돼 있는지도 보여준다.

지귀연은 정작 이 땅의 5·18과 6·29, 그리고 지난 비상계엄 때 한겨울 거리로 나선 시민들의 역사는 한 줄도 소환하지 않았다. 한국 민주화의 피와 눈물을 외면한 그런 세계사 소환은 결국 인간에 대한 이해가 빠진 벌거벗은 인문 감수성일 뿐이다.

사법 기득권의 관성에 젖어 기계적으로 휘두르는 판결 망치는 정의가 아니라 폭력이다. 시민의 상식과 동떨어진 판결은 법의 권위를 제 손으로 갉아먹는 일이다. 법복 뒤에 숨어 먼 나라 찰스 1세를 찾기 전에 이름 없는 시민들의 헌신과 희생부터 살폈으면 어땠을까.

이 모든 것은, 법을 국민과 상식 위에 군림하는 권위주의 지배 도구로 생각하는 엘리트 법관들의 비뚤어진 특권의식이 빚어낸 결과다. 법이 상식 위에 서는 순간 그것은 이미 정의가 아니다. 시민 위에 군림하며 훈계하는 저 오만하고 높은 법대(法臺)부터 민초의 눈높이로 당장 낮춰야 한다.

 

*이 글은 2026년 2월 20일자 투데이신문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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