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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기노 칼럼] 친박을 닮은 친문, 친이를 닮은 친명

성기노피처링대표 2026. 9. 18.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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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사당 전경. (사진=KBS 캡처)

 

정치학에서 ‘계파(faction)’는 정당 내부에서 특정 지도자나 이념·정책,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결집해 공동의 정치적 목표를 추구하는 집단을 말한다. 한국 정치의 계파는 특히 이념이나 정책 못지않게 특정 정치지도자를 중심으로 형성되는 인적 결사체 성격이 강하다. 친박·친이·친문·친명이라는 익숙한 이름들이 하나같이 노선이 아니라 대권주자에게서 나왔다는 사실이 그 증거다.

기자들에게 계파는 정치의 이면을 읽어내는 일종의 암호해독기다. 발언의 뜻이 모호할 때 계파라는 코드를 대보면 뜻밖에 풀린다. 물론 그 프레임에 갇혀 본질을 놓치기도 한다. 그럼에도 서로 다른 시대와 진영의 계파들을 나란히 놓고 보면 의외로 닮은 습성과 작동 방식이 발견된다.

이에 계량적 분석에 따른 실증 연구가 아니라 취재 과정에서 체득한 경험을 바탕으로 계파의 특성을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눠보는 ‘인상비평’을 해보고자 한다. 먼저 계파를 자처하는 정치인들을 만나볼 때 노선이나 공약보다 먼저 보이는 것은 그들이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다. 누구를 들이고 누구를 밀어내는가, 그 경계선은 어디에 그어져 있는가. 친박과 친이, 친문과 친명을 서로 비교해보게된 것도 이런 기준점 때문이다. 

친박의 출입문에는 엄격한 보안심사가 있었다. 박근혜라는 한 주군에 대한 충성심 유일한 입장권이었고 그 도와 진위를 가리는 ‘진박 감별사’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반면 친이의 출입 빗장은 비교적 헐렁했다. 출신도 이력도 제각각인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실용과 성과라는 느슨한 깃발 아래 서로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친문은 친박을 닮은 것 같다. 가치와 정통성을 앞세우지만 그들의 가치(라 쓰고 순혈주의라 읽는다)를 제대로 공유하는지, 그것을 심사하는 문턱이 상당히 높은 편이다. 결속력은 있지만 배타적이다.

반면 친명은 친이를 닮았다. 정통성보다 실용과 확장성을 앞세운다. 상대적으로 출입의 문턱도 낮은 편이다. 어제까지 다른 계파에 있던 사람도 들어온다. 원래 이렇다 할 세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재명’이라는 새로운 실용과 개혁 리더십의 깃발 아래 모여든 연합군이다.

그렇다면 앞서 언급한 계파들의 ‘출입 심사’에 그 강도의 차이가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것은 계파의 이념이나 가치, 정통성이 기준이 아니라 수장의 권력 기반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박근혜와 문재인은 당내 정통성을 이미 확보한 상태에서 계파를 운영했다. 확장할 이유가 없으니 순혈을 관리하는 쪽이 합리적이었다. 이명박과 이재명은 비주류에서 출발했다. 세를 불려야 했으니 문을 열 수밖에 없었다. 확장하기 위해선 당연히 개방과 실용이 우선시 됐다. 이렇듯 계파의 성격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의 위치가 빚어낸 정치적 산물이다.

이 과정에서 더 흥미롭게 보이는 지점은 그런 정치공학보다 계파가 만들어내는 ‘사람의 문화’다. 정치권을 취재하면서 느낀 계파의 차이는 거창한 노선이나 정책보다 사람을 대하는 아주 사소한 태도에서 더 선명하게 드러날 때도 있다.

특히 친문 정치인들과 그 주변에서 종종 높은 벽을 느낀다. 물론 개인적 경험을 일반화할 수는 없다. 친절한 친문도 있고 거만한 친명도 많다. 그럼에도 정치인뿐 아니라 그 주변의 언론인과 평론가, 지식인들까지 넓혀보면 묘하게 겹쳐지는 분위기가 있다.

자신들이 공유하는 정치적 가치와 정통성에 대한 강한 자부심, 그리고 그 울타리 바깥에 있는 사람을 바라보는 일정한 거리감과 배타적인 시선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들의 태도가 옳으냐 그르냐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가치에 대한 강한 확신은 왜 때때로 사람을 가르는 높은 문턱으로 변이되는가 하는 점을 주목하고 싶다.

 

왜 우리 정치는 내가 옳다는 자기 확신이 강할수록 ‘저 사람도 우리와 같은 가치를 공유하는가’를 확인하려는 습성이 강한 것일까. 그리고 그 확인 절차가 반복되면 가치 공동체는 어느 순간 입교 자격만을 따지는 ‘순혈 감별 집단’이 될 위험성이 크다. 

친박에서도 비슷한 장면을 봤다. 박근혜에 대한 충성과 보수의 정통성은 구성원을 묶는 강력한 접착제였지만 동시에 ‘진짜 친박’(진박)과 가짜를 가르는 기준이 됐다. 이념은 정반대인데도 친박과 친문이 사람을 받아들이는 방식에서는 묘하게 닮아 보였던 이유다.

반대로 친이와 친명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는 훨씬 잡다하고 느슨하다. 어제 다른 편에 있었던 사람이 오늘 들어오고 출신과 정치적 이력도 제각각이다. 그렇다고 이것을 곧바로 포용이라고 칭찬할 일도 아니다.

문턱이 낮은 이유는 타인을 존중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이 지금 정치적으로 쓸모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가치보다 성과와 세력 확장을 우선하면 사람을 받아들이기는 쉬워지지만 권력이 사라졌을 때 함께 남을 이유도 약해진다.

결국 친박·친문과 친이·친명의 유사성과 차이를 들여다보면 그 귀결점은 어느 계파가 더 우월한지를 가리는 데로 모아지지 않는다. 대신 가치와 정통성을 지키기 위해 문을 닫는 정치와 실용과 확장을 위해 문을 여는 정치가 각각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는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가치가 너무 강하면 정치는 종교처럼 되고 실용만 남으면 정치는 거래처럼 된다. 좋은 정치는 아마 그 둘 사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정치에서 지켜야 할 것은 계파의 순도가 아니라 가치의 내용이 돼야 한다.

그들만의 문을 꽁꽁 걸어 잠그고 끝까지 살아남는 계파가 정치 발전에 무슨 도움이 될까. 계파의 수준은 누가 들어와 있느냐가 아니라 누구까지 들어올 수 있느냐에서 드러난다. 그런 기준으로 보면 희미하게나마 건강한 계파의 윤곽도 그려질지 모른다. 그런데, 계파 이름에서 사람이 빠지는 날이 오기는 할까.

 

*이 글은 2026년 9월 18일자 투데이신문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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