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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기노 칼럼] 관계의 온도

성기노피처링대표 2026. 1. 2.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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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AI 생성 이미지)

 

친구의 갑작스런 부음을 접했다. 대학동기였지만 그리 친분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부고를 받기 2주 전쯤에 잠시 대화를 나눠본 기억이 있어 그의 죽음은 충격이었다.

황망한 마음으로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친구들이 모여 슬퍼하고 있었다. 부모상을 당했을 때와는 또 다른 분위기였다.

부모의 죽음이 삶의 한 장이 넘어가는 아픔이라면 또래의 죽음은 나와 연결되는 것 같다. ‘타자’의 죽음이 나와 동일시되는 건 ‘나이’라는 같은 물리적 시간과 공간을 친구와 같이 점유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서 있던 자리는 곧 내가 서 있는 자리였고 그가 통과하던 생의 마디는 내가 지금 겪어내는 현재였다.

빈소에 앉아 고인을 생각했지만 함께 했던 기억들이 손에 꼽을 만큼 적어 말없이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너는 말이 원래 없느냐”는 친구의 물음에 ‘할 말이 없어서...’라며 말꼬리를 흐렸다. 그와 친분이 깊었던 친구들은 상실의 비통함을 술로 잊으려 했지만 나는 그럴 추억조차 없어 당혹스럽기도 했다.

친구는 지난해 말 모임에서 노래 한 자락을 멋지게 불렀다. “너, 우리 동기 중에 트로트는 최고다”라는 나의 사소한 칭찬 한마디에 친구는 아이처럼 환한 미소를 지으며 기뻐했다. 사실 그날 내가 친구에게 건넨 말은 대단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그의 노래를 진심으로 듣고 진심으로 좋았다고 말했을 뿐이다. 그런데 그 짧은 문장 하나가 그에게는 오래 간직하고 싶을 만큼의 위로였던 것 같다.

빈소에 말없이 앉아있으니 그 친구가 감격해하는 모습이 자꾸 떠올랐다. 오랜 시간 고독 속에서 침잠해 있었을 그의 영혼에 나의 짧은 한마디가 어떤 의미로 다가왔을지, 그가 떠나고 난 뒤에도 계속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우리는 날마다 수많은 씨줄 날줄의 인간관계를 직조해가며 살아간다. 그래서 관계의 온도를 만남의 횟수나 시간의 양으로 계산하곤 한다. 친구(親舊)라는 단어조차 ‘친할 친’에 ‘오랠 구’자를 쓰니 말이다. 하지만 진정한 관계의 밀도는 물리적인 시간의 층위가 아니라 서로의 진심이 맞닿았던 찰나의 공감으로 결정될 수 있다는 사실을, 그 친구의 마지막 미소에서 느낄 수 있었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누군가에게 그런 공감의 한 마디를 기다리며 살아가는 건 아닐까. 거창한 위로가 아니라 내가 내어놓은 삶의 한 조각이 누군가에게 가닿았음을 확인시켜 주는 ‘존재론적 승인’ 말이다. ‘네가 거기 있었구나’, ‘네가 한 게 참 좋았다’는 그 진심의 공명이야말로 우리가 타인에게서 갈구하는 가장 절실한 삶의 증거였을지도 모른다.

단 한 번이라도 진짜 마음을 주고받았던 순간이 있었다면 그 관계는 결코 부유(浮遊)하지 않을 것이다. 친구의 죽음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애도는, 함께한 시간의 부재를 낯설어하는 게 아니라 그 찰나의 진심과 공감을 되새겨보는 것이었다.

관계의 온도는 물리적 시간의 길이에 따라 무한정 올라가는 것이 아니다. 서로의 존재를 투명하게 긍정해주던 그 맑은 공감, 마음과 마음이 교차했던 그 찰나가 사실은 관계의 본질이었음을 뒤늦게 깨닫는다.

비록 함께한 추억은 적을지라도 그 짧고 강렬했던 온기 하나를 품고, 나는 친구를 조금은 편안한 마음으로 떠나보낼 수 있었다. 그날 친구가 보여준 환한 미소가 그와 나 사이를 잇는 마지막 추억이었다고 믿으면서.

 

*이 글은 2026년 1월 2일자 투데이신문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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