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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기노의 정치 피처링
[성기노 칼럼] 순도 100%의 개혁은 존재하는가 본문

순도 100%의 개혁은 존재할까. 질문을 던져놓고 보니 답은 이미 나와 있는 것 같다. 그런데도 이 질문을 붙들고 있는 건 지금 한국 정치가 바로 이 오래된 명제 앞에서 좌표를 잃었기 때문이다.
최근 한 친청계 유튜버가 이재명 대통령을 향해 “개혁은 개뿔”이라고 비아냥거렸다. 이 대통령이 개혁을 추진하다 지지율이 무너졌다면 변명이라도 되겠지만 개혁 자체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게 과연 같은 진영 대통령에게 할 소리인가. 그러나 이런 말은 이제 드물지 않다.
며칠 전 필자는 한 사석에서 친명계와 반명계 지인이 격론을 벌이는 모습을 지켜봤다. 한쪽은 대통령의 국정 운영 현실을 이해해야 한다고 했고 다른 쪽은 약속한 개혁을 그대로 이행하면 된다고 맞섰다. 양측이 타협할 지점은 보이지 않았고 끝내 평행선에 선 채 헤어졌다. 하지만 양쪽 모두 이해되는 대목이 있었다. 그래서 개혁의 순도를 다시 묻게 된다.
1974년 미국 닉슨 대통령은 기업의 건강보험 제공 의무화 등을 담은 개혁안을 제시했다. 더 근본적인 개혁을 원했던 민주당의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과는 끝내 합의하지 못했다. 워터게이트로 닉슨이 물러나면서 개혁의 기회도 사라졌다.
미국은 36년 뒤인 2010년에야 오바마케어를 도입했다. 물론 오바마케어가 1974년 닉슨의 개혁안과 동일한 수준의 개혁은 아니지만 적어도 진전은 이뤄낸 셈이다. 케네디는 훗날 당시 합의에 이르지 못한 것을 크게 후회했다. 더 나은 개혁을 추구하다 가능한 개혁마저 놓친 셈이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2004년 노무현 정부 당시 열린우리당 이부영 의장은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와 국가보안법의 대표적인 독소조항을 삭제하는 방향으로 잠정 합의했다. 그러나 완전 폐지를 주장했던 유시민 등의 여권 강경파와 야당의 저항 속에 입법은 무산됐다.
결국 부분 개정조차 이루지 못했고 22년이 지난 지금도 국가보안법은 살아 있다. 순도 100%를 고집하다 개혁의 일부조차 실현하지 못한 것은 아닌지, 이 오래된 논쟁은 지금도 우리 정치에 개혁의 본질을 묻고 있다.
그렇다면 모두를 만족시키는 개혁이 존재하기는 하는가. 독일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1919년 강연에서 정치인의 두 가지 윤리를 제시했다. 신념윤리와 책임윤리다. 신념윤리를 따르는 사람은 자신이 옳다고 믿는 원칙을 끝까지 지키려 한다. 반면 책임윤리를 따르는 사람은 자신의 신념뿐 아니라 그 행동이 낳을 현실적 결과까지 책임지려 한다. 무엇이 옳은가를 중시하는 것이 신념윤리라면 옳다고 믿는 일을 했을 때 어떤 결과가 발생하는가까지 따지는 것이 책임윤리다.
베버는 둘 중 하나만 옳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진정한 정치인에게는 신념과 책임이 모두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신념이 없는 정치는 기회주의로 흐르기 쉽고 책임이 없는 신념은 현실을 외면한 독선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정치를 업으로 삼는 사람은 자신이 옳다고 믿는 가치뿐 아니라 그 선택이 낳을 결과까지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통령은 책임지는 자리에 올라가면 좌우를 살펴야 한다. 이건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효율성과 완성도의 문제다. 개혁의 목표를 끝까지 밀어붙이는 것과 개혁을 실제로 완성하는 것은 별개의 영역이다. 한국 정치도 국가보안법 폐지 논란에서 이런 진통을 겪었다.
혁명이나 개혁에는 언제나 순수성을, 순도 100%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김어준조차도 순도 100%에서 조금만 희석되게 보이면 지지층이 까기 시작한다. 공격하는 사람들은 정책을 집행하는 사람과 같은 책임을 지지는 않는다. 오로지 누가 더 선명한지, 그 선명함을 누가 끝까지 유지하는지만 중요하다.
베버식으로 말하면 그들은 신념윤리의 맨 앞자리에 몰려 있다. 그 자리는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운 청정무구의 영역이다. 결과를 직접 떠안지 않는 자리에서는 언제나 자신만 옳고 순백하다고 믿기 쉽다.
사실 권력을 감시하고 견제한다는 점에서 강경파의 반대 자체는 민주주의의 건강한 요소다. 문제는 비판의 기준이다. 수사와 기소를 분리한다는 공약에 어디까지가 개혁이고 어디부터가 후퇴인지는 명확하게 적혀 있지 않다. 누가 어떤 기준으로 해석하느냐에 따라 개혁의 순도는 달라진다. 강성지지층의 주장도, 대통령의 현실론도 그 자체로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 없다.
그렇다고 대통령의 결정을 무조건 이해하고 감싸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이해가 지나치면 면죄가 되고 면죄가 쌓이면 감시와 견제도 사라진다. 반대로 국정 운영의 결과에 책임지지 않는 사람들이 오로지 개혁의 선명성만을 요구한다면 그 신념 역시 독선으로 흐를 수 있다. 원칙 없는 타협도 위험하지만 타협 없는 원칙도 불안하다.
이재명의 현실론과 강성지지층의 원칙론에는 각각 일리가 있다. 하나는 결과를 말하고 다른 하나는 신념을 말한다. 진정한 정치는 이 둘이 서로를 붙잡으며 균형을 찾을 때 가능하다. 민주주의는 절충과 타협, 합의의 과정이다. 어느 한쪽만 전적으로 옳다고 주장하는 순간 공존의 지대는 사라진다.
순도 100%의 개혁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개혁의 순도를 놓고 끝없이 다투면서도 결국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공동체 의식, 그리고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공존의 길을 찾아가는 성숙한 시민의식뿐이다.
‘우리’라는 공동체의 자리로 다 같이 돌아갈 것이라는 믿음과 관용, 어쩌면 그것이 순백의 개혁일지도 모른다. 그 길 위에서 돌아갈 다리마저 불살라버리고 ‘개혁은 개뿔’이라고 빈정댄다면 그것은 개혁의 순도가 아니라 개혁에 섞여든 불순물일 뿐이다. 서로를 죽이는 자멸의 개혁을 이쯤에서 멈췄으면 한다.
*이 글은 2026년 10월 16일자 투데이신문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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