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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기노 칼럼] 반중(反中)의 시대

성기노피처링대표 2025. 10. 10.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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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26일 서울 중구 명동 주한 중국대사관 인근에서 강성 보수 성향 단체 민초결사대가 반중 시위를 벌이는 가운데 시위대가 최근 피살된 미국 우파 활동가 찰리 커크 사진을 들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최근 반중(反中), 혐중(嫌中) 시위가 크게 늘었다고 한다. 특히 중국인 단체관광객의 무비자 입국이 시행된 이후 극우 성향 단체들의 반중 시위가 폭증하고 있다. 외국인들이 많이 다니는 서울 시내 유명 관광지 일부에서는 ‘중국 유학생은 잠재적 간첩’이라는 중국인 혐오 현수막도 내걸려 보는 이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다.

 

국내 반중 시위에는 불순한 정치적 동기가 깔려 있다. 다분히 감정적인 혐중 정서가 극우 세력들의 정치적 생존을 위한 ‘땔감’으로 쓰이고 있다.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 이후 일부 극우 단체들은 ‘보수의 정치적 위기가 중국의 정치 개입 때문에 일어났다’는 음모론을 설파하고 있다. 야당 일부 인사들은 중국인 무비자 입국을 안보 위기와 범죄로 연결 짓기도 한다.

 

그런데 극우 세력들이 중국인 무비자 입국을 비난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설득력이 떨어진다. 중국인 단체 관광객 무비자 정책은 윤석열 정부 시절부터 추진된 것이다. 보수 정권이 중국인 무비자 정책을 결정한 것에 대해 극우 세력이 반중 시위를 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다.

 

일각에서는 관광 경제 분야에서 중국 혐오 정서가 국가 이미지와 산업 전반에 심각한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하고 있지만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도 돌출된다. 최근의 반중 현상을 단순히 중국 혐오로만 읽는다면 피상적이다. 그 안에는 한국 사회 깊숙이 자리한 자주성 불안, 외세 피로, 그리고 이방인에 대한 배타성과 폐쇄성의 긴장이 교직(交織)하고 있다.

 

사실 한국인의 반중 정서는 안보와 역사 등의 시각에서 볼 때 이해가 되는 측면이 없지는 않다. 중국은 경제적으로 가장 중요한 ‘고객’이지만 심리적으로는 가장 가까운 ‘위협’ 대상이 된다. 한국과 북한이 통일하는 과정에서 중국이 북한을 먼저 점령할 것이라는 우려나 대만 위기 때 한국도 중국과의 전쟁에 빨려 들어갈 것이라는 안보적 심리불안 상태가 상존하고 있다. 여기에는 과거 역사 속에서 중국은 언제나 한국을 침략과 복속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한국인의 뿌리 깊은 집단 피해의식이 자리잡고 있다.

 

한국인의 반중 감정에는 가까운 강대국에 대한 피로감도 숨어 있다. 중국의 자본, 관광객, 온라인 콘텐츠는 이미 한국인의 일상 속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 이 과잉접촉은 신뢰보다 불안을, 기대보다 피로를 낳는다. 이런 점에서 한국인의 반중은 과잉 세계화에 대한 집단적 방어 본능일 수도 있겠다.

 

또한 한국 사회에는 오래된 자주성 강박증도 있다. 오랫동안 외세의 영향 아래 놓여 있었던 한반도의 뼈아픈 역사는 “우리는 우리 힘으로 살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강제한다. 결국 ‘중국이 싫다’는 심리 뒤에는 ‘우리가 너무 약하다’는 자각이 숨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안보와 역사, 심리적 요소가 한국인의 반중 정서를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다.

 

인류는 지금 다문화와 인종 융합, 문화 복합의 시대로 나아가고 있다. 하지만 정작 ‘이방인’을 견디지 못하는 모순과 갈등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국경은 허물어졌지만 마음의 벽은 더 높아졌고, 다양성은 찬양받지만 공존의 감수성은 사라졌고, 그 빈 공간에는 배타성과 폐쇄성이 ‘세계인’을 위협하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인간의 자기모순적 감정이 정치에 흡수되고 소진될 때 그 부작용이 더욱 커진다는 것이다.

 

‘외지인’에 배타적인 감정은 곧 극우의 선동 재료가 된다. 이념의 이름으로, 안보의 명분으로 ‘우리 안의 타자’를 밀어내는 움직임이 정당화된다. 그 순간 자주성은 ‘자폐’로 바뀌고 ‘이방인’은 공존의 대상이 아닌 자국의 실패를 가리는 핑곗거리이자 희생양으로 소비된다. 이런 ‘가까운 타자에 대한 피로감’은 사실 트럼프 시대가 만들어낸 ‘아메리카 퍼스트’의 위험한 도출물들이다. 미국 제조업이 혼수상태에 빠진 것을 전 세계를 상대로 한 ‘관세 조리돌림’으로 소생시키려는 트럼프의 ‘마가’는 제국의 몰락을 암시하는 전조일 뿐이다.

 

그런데 문제는 미국이 퍼뜨린 ‘자국 중심주의’ 수출품이 이제 전 세계에서 너도 나도 구매하는 중요한 물품이 돼 간다는 점이다. 최근 일본의 ‘여자 아베’로 불리는 다카이치가 총리 등극을 목전에 두고 있는 배경에도 ‘저팬 퍼스트’라는 빗나간 애국주의가 숨어 있다. 트럼프의 ‘마가’는 전 세계 국가들이 너도 나도 자국의 우월적 지위와 이익만을 내세우는 ‘진군가’로 변하고 있다.

 

한국의 반중도 트럼프의 ‘아메리카 퍼스트’ 나비효과가 빚은 파편의 한 조각일 수 있다. 트럼프가 무너뜨린 건 글로벌 무역 질서만이 아니다. 그는 세계인에게 ‘공존보다 생존이 먼저’라는 배타적 애국주의의 메시지를 뚜렷하게 남겼다. 이제 세계인들은 서로에게 점점 더 불편한 존재가 될지도 모른다는 불행한 생각이 스멀스멀 몰려온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 혐오를 조장하고 이용하는 정치인들을 깨부순 건 인류의 휴머니즘과 사랑이었음을 역사는 증명하고 있다. 오늘의 반중 정서가 두려움이 아닌 성찰로, 증오가 아닌 포용으로 나아갈 때 한반도의 미래와 안전도 보장받을 수 있다. 

 

*이 글은 투데이신문 2025년 10월 10일자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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