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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암살범 향한 10년의 추격과 응징...잊혀지고 있는 청년 곽태영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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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암살범 향한 10년의 추격과 응징...잊혀지고 있는 청년 곽태영

성기노피처링대표 2018. 8. 15. 1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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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 선생의 시해범 안두희를 이곳에서 비수로 응징했지만 죽이지는 못했습니다. 민족의 반역자가 어떻게 단죄받지 않고 이 땅에 떵떵거리고 살 수 있단 말입니까.”


1949년 6월 26일 낮 12시 45분, 백범 김구 선생이 육군 소위 안두희가 쏜 45구경 권총에 맞아 숨졌다.


광복을 위해 평생을 바친 73세 독립운동가가 쓰러지자 남북 통일정부 수립을 염원하던 국민은 큰 충격에 빠졌다.


이때 국민학교 6학년생 곽태영 군은 “안두희를 죽여야겠다”는 각오를 새겼다. 그는 숙부가 독립운동가였던 애국 집안의 자손이었다.


시간이 흘러 성인이 된 곽태영은 김구 선생 묘역을 찾았다. 그곳에서 안두희를 응징하기로 맹세하고 그의 사진을 가슴에 품은 채 보따리 장사를 시작하면서 추적에 나섰다.


백범 김구 선생 암살범 안두희.




안두희는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사면 복권돼 군에 복귀, 중령으로 예편했다.


그는 양구에서 3군단 예하 2개 사단에 군납업을 했는데, 강원도 납세 실적 2위를 기록할 만큼 사업을 키웠다.


집 앞에는 커다란 연못을 만들고 그 가운데 정자를 세워 호화로운 생활을 누렸다.


김구 선생 암살범이 양구에 사는 것을 알게 된 청년 곽태영은 인근 염소농장에 하숙하며 기회를 엿봤다.


1965년 12월 22일 아침.


안두희는 세수를 하려고 목에 수건을 걸치고 양치질을 하며 공장 앞마당으로 걸어 나왔다.


곽씨는 그에게 다가가 목에 비수를 겨누며 “백범 선생님 시해 배후를 밝혀라”고 윽박질렀다. 뒷걸음질 치는 그를 습격한 곽씨는 커다란 돌로 다시 머리를 내리쳤다.


곽씨는 의식을 잃은 그가 숨졌다고 생각해 그 자리에서 “김구 선생 만세! 남북통일 만세!”를 외쳤다. 그의 나이 29세, 추격을 시작한 지 10년째 되던 해 일이었다.




하지만 안두희는 두 차례 수술을 받고 겨우 목숨을 건졌다. 곽씨는 1심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다음 해 7월 항소심에서 재판부는 원심을 파기하고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했다. 범행 동기가 ‘공분’이었다는 판단에서였다. 곽씨는 수감된 지 7개월이 지나 석방됐다.


청년 곽태영의 의분과 결단에 안두희는 백범 암살 16년여 만에 처음으로 응징받게 됐다.


이 사건으로 전국에서 애국 청년 곽태영을 석방하라는 서명운동이 일어나 60만 명이 참여했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장한 일을 했다는 격려 편지를 1만여 통이나 받았다.


또한, 아버지는 아들이 자랑스럽다며 마을 사람들에게 잔치를 벌이기도 했다.


김구 선생의 장례 행렬.




이후 안두희는 1996년 10월 23일 오전 인천시 중구 자택에서 당시 버스 기사였던 박기서 씨가 휘두른 정의봉에 맞아 사망했다. 온전한 죗값을 받는 데는 47년이 걸린 것이다.


곽씨가 안두희를 응징했던 곳 인근인 양구교육청 옛 도서관 앞마당에는 현재 비석 세 개가 우뚝 서 있다.


오른쪽은 곽태영 선생 의거비로 ‘국부 광복의 거성 김구 선생, 만고의 원흉 괘심한(괘씸한) 아드흐(안두희), 억만인 흠모할 곽태영 의사’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가운데는 김구 선생 어록비로 ‘평생염원 오국독립’이 담겼으며, 왼쪽은 민족정기소생협회 33인이 세운 곽태영 기념비가 자리하고 있다.


과거 이 비석들은 가시덤불과 쓰레기 더미에 가려 빛을 보지 못했다.


2002년 김영진 양구주민연대 대표가 방치된 비석을 발견하고 여러 시민단체와 뜻을 모아 사업비 440만원을 들여 말끔히 정비해 2004년 8월 15일 지역 주민 150여 명과 함께 정비 준공식을 열었다.


양구 주민들은 해마다 8·15 광복절 기념행사를 이곳에서 열고 백범 김구 선생의 독립정신과 곽태영 선생의 의거를 기리고 있다.


김영진(71) 대표는 “지금 세대는 곽태영 선생과 안두희는 물론 백범 김구 선생도 잘 알지 못한다”며 “광복절마다 높은 뜻을 기리는 것은 우리뿐 아니라 다음 세대까지 이어져야 할 책임”이라고 말했다.


곽태영 씨는 일제 잔재 청산과 박정희 흉상 철거, 박정희 기념관 건립 반대 운동 등 사회 운동에 앞장서다 2008년 12월 1일 지병으로 자택에서 별세했다.




한편 1945년 8월 15일 해방 직전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으로서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백범 김구는, 해방 직후 중국에서 귀국하여 새로운 국가 건설에 앞장섰다. 특히 김구는 해방 이후 치열한 좌우대립의 과정에서 신탁통치 반대운동 등 우파의 정치활동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1947년 말 남북 분단의 가능성이 커지면서 김구는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던 이승만과 결별하고, 중도파였던 김규식(金奎植)과 함께 ‘남북협상’ 등 분단을 막기 위한 노력을 전개하였다. 결국 분단을 막는 데 실패한 김구는 1948년 8월 15일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참여하지 않고, 사실상 정계 2선으로 물러났다.


그러던 중 1949년 6월 26일 김구는 현역 육군 포병소위이자 김구가 이끌던 한국독립당(약칭 한독당) 당원이었던 안두희에게 숙소이자 집무공간이었던 서울 경교장에서 4발의 총탄을 맞고 사망하였다. 김구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여론은 깊은 애도를 표명하였다.


김구 암살 후 장례식까지 10일 간 다녀간 조문객은 약 120여 만 명으로 추산되었고, 건물 안에 들어오지 못한 문상객도 많았다. 장례식이 있던 7월 5일 서울에서 거행된 장례식에는 약 40∼50만의 인파가 몰려들었고, 다른 도시에서도 각각 수만 명씩이 모여 고인을 애도하였다.


사건 당시 정부와 군 당국은 이 사건을 한독당 내부의 갈등에서 비롯된 것으로 몰아갔다. 사건 직후 국방부는 안두희가 김구와 한국독립당의 노선을 둘러싸고 언쟁을 벌이다가 김구를 살해한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그리고 안두희를 김구에게 소개시키고 한국독립당에 가입하게 했다는 혐의로 한국독립당 조직부장이자 광복군 지휘관이었던 김학규를 구속하였다.


7월 2일 이승만 대통령도 이 사건이 한국독립당의 내분으로 일어난 것이라는 내용의 특별성명을 발표하였다. 7월 20일 군 당국은 최종 수사결과를 발표하면서 이 사건을 대한민국 정부를 전복하려 한 친공산주의적인 한국독립당의 음모에 맞선 안두희의 ‘의거’라고 규정하였다. 안두희도 재판 중 2계급 특진을 하였고, 사건 1년여 만에 형 면제 처분을 받고 군에 복귀하는 등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특혜를 받았다.


오랜 시간에 흘러 한국 사회 전반에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김구 암살사건에 대한 진상규명의 목소리가 커졌다. 여기에 1992년 드디어 안두희의 육성 증언이 나왔다. 이에 국회는 1993년 이 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한 조사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약 2년간의 조사 후 위원회는 「백범김구선생 암살진상국회조사보고서」를 작성하였고, 이 보고서는 1995년 12월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였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김구 암살사건은 당시 정부 발표처럼 한국독립당의 노선을 둘러싼 내분 과정에서 안두희가 개인적 차원에서 우발적으로 저지른 사건이 아니라, 면밀하게 준비·모의되고 조직적으로 역할이 분담된 정권 차원의 범죄 행위였음이 밝혀졌다.


먼저 암살범 안두희의 1차적 배후는 ‘군부’였다. 즉, 포병사령관으로 안두희의 직속상관이자 같은 서북청년단 출신인 장은산(張銀山)이 암살을 명령하였고, 사건 발생 이후 김창룡 특무대장이 적극적으로 개입하였으며 채병덕 총참모장, 전봉덕 헌병 부사령관 등이 사후처리를 주도하였다는 것이다. 이들은 모두 일제강점기 일본군, 만주군, 경찰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었다.




‘군부’와 더불어 안두희가 가담했던 ‘서북청년단’ 세력들도 이 사건에 깊이 관여하였다. 또한 보고서는 김구 암살사건의 배후와 관련해 가장 큰 쟁점이 되어 온 이승만 대통령의 관련 여부에 대해, 암살 사건 이후 안두희의 행적과 군부의 보호 조치가 이승만의 묵인 없이는 불가능하였고, 또 그가 이 사건에 대해 도덕적·정치적 책임을 져야 하는 위치에 있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이 사건에 사전 개입하거나 암살을 지시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판단을 내렸다. 미국의 관련 여부에 대해서도 미국이 암살사건에 대해 상당한 정보와 지식을 갖고 있었지만, 암살사건에 직접 개입했다는 증거는 찾을 수 없다고 결론 내렸다.


국회의 보고서 등 지금까지 이루어진 관련 조사와 연구를 종합해 보면, 먼저 김구 암살사건은, 김구가 친일청산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왔다는 점에서, 1949년 6월 전후에 일어난 국회프락치사건이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습격사건 등 정부 내 친일세력이 친일청산에 앞장선 반대세력을 물리적으로 탄압하고자 했던 일련의 사건들과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었다.


또한 당시 김구가 정계에 복귀할 가능성이 있었다는 점에서, 정권 차원에서 가장 위협적인 정치적 경쟁자를 제거하는 동시에, 김구와 한국독립당까지 친공세력으로 몰아붙임으로써 정권의 기반인 극우반공체제를 강화하려 했던 조치였다고도 평가된다.


최근에는 또 다른 증언들도 나오고 있다. 백범 김구 서거 69주기(26일)를 맞아 백범 암살 사건과 관련한 증언이 재조명되고 있다. (사)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김인수(69) 대표는 지난 6월 25일 서울 강북삼성병원내 경교장에서 한 언론과 만나 “당시 육군 소위 안두희는 ‘백범 암살 6일 전 신성모와 채병덕 등 당시 군 수뇌부와 경무대에 갔었다. 이승만은 면대한 자리에서 나더러 높은 사람 말 잘들어라고 말한 사실이 있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김 대표에 따르면 안두희는 “‘북어대가리’(신성모)가 갑자기 육본으로 불러 바람쐬자고 나가길래 무심코 따라가니 경무대였다”면서 “경무대에서 이승만 대통령 집무실로 나를 안내한 사람을 똑똑히 기억한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백범 암살 배후에 이승만 전 대통령과 한국주둔 미정보부대(CIC)가 관련돼 있을 것이란 추측만 나돌았고, 관련 내용은 아직 베일에 가려져 있다.


김구의 암살은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그는 남과 북의 단절과 대립을 반대했던 통일주의자의 시조였다. 1948년 4월 19일, 김구가 북행길에 오른 시기는 임시정부 수립방안을 협의하기 위해 설립된 미소공동위원회가 전년 가을에 결렬됐고, 같은 해 2월에는 유엔에서 남한 단독 총선거안이 가결돼 남북 분단이 전면화될 때였다.


김구가 참석한 남북조선제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이하 남북연석회의)는 4월 19~23일에 평양에서 열렸다. 남쪽에선 41개 정당·사회단체에서 총 396명이, 북쪽에선 민주주의민족전선 아래 15개 정당·사회 단체 대표 300명이 참석했다.


김구는 4월 22일 회의에 참석해 축사를 낭독했다.


"조국이 없으면 민족이 없고, 민족이 없으면 무슨 당, 무슨 주의, 무슨 단체가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현 단계에 있어서 우리 전 민족의 유일한 최대 과업은 통일독립의 전취(戰取)인 것입니다"


남과 북의 정상이 다시 만났고, 곧 평양에서 3차 남북정상회담이 열릴 계획이다. 김구의 유언같은 축사가 발표되고 70년이 지났다. 이제 남과 북은 김구의 유언을 다시 새겨들어야 할 때다.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를 둘러싼 주변국들의 상황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우리가 변하지 않으면 분단의 장벽은 영원히 공고화될 것이다.


성기노 피처링 대표(www.featuri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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