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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 교수 "영화 '기생충'에 전 세계 열광...뻥튀기나 국뽕 아니다"

성기노피처링대표 2020. 2. 15.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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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 교수의 생각과 가치관을 존경합니다. 평소 글로만 그를 만나다가 이번에 직접 그의 몸짓 말투까지 접하게 됐습니다. 한국말을 잘 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정확하고 적확하게 표현할지 몰랐네요. 평소 책과 언론 글을 많이 읽으면서 정밀하게 단어 선택을 하고, 발음도 정말 노력을 많이 한 흔적이 엿보입니다. 웬만한 방송진행자보다 더 정확한 한국말을 구사하시네요. 20여분 방송을 정말 집중해서, 귀기울여 잘 들었습니다.

그가 이렇게 정확하게 한국말을 쓰는데, 그것에 담긴 내용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예리하고 풍부한 시각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이번 총선에 담긴 의미와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로 바라본 우리 정치의 주류 폐해도 시원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법조인출신이 기형적으로 많아 발생하는 한국 정치의 일방적이고 폭력적인 여론 수렴구조도 이번 총선에서 반드시 바꿔야하는 중요한 의제입니다. 다양한 출신 인사가 다양한 이해관계를 국회에서 표방할 수 있도록 비례대표를 선택할 때만이라도 이상한 위성정당에게는 눈길을 돌리지 말았으면 합니다.




한국정치처럼 역동적이고 실험적인 장도 없을 것 같습니다. 기생충이 전 세계인의 사랑과 공감을 얻는 것도 한국정치에 특히 투영된 계급과 불평등의 문제가 영화속에 녹아내린 결과가 아닐까 합니다. 한국정치가 지금은 퇴행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민도가 높고 시민사회의 상식과 성숙된 여론형성이 정치의 수준을 더 높여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 훌륭한 시민의식을 언론이 제대로 반영해주는 것이 상당히 중요합니다. 미천하지만 시민들에게 형성되는 상식과 생각의 흐름을 잘 포착해 글로 옮기고 싶습니다. 다양성을 인정해주는 정치, 출신보다 능력이 존중받는 정치, 무엇보다 깨어있는 시민들이 참여해 세상을 바꾸는 정치가 되도록 저도 노력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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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9월 15일 박노자 교수가 한겨레의 '김두식의 고백'이라는 토요판 코너와 인터뷰한 내용 일부를 소개합니다. 이 기사에서 박노자 교수의 개인적인 역사도 잠깐 소개되기에 일부를 발췌해서 그대로 참고로 올립니다. 인터뷰는 김두식 경북대 교수가 진행했습니다. 

 

 박노자 누구인가?

 

1973년 소련 레닌그라드(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변전기 설계사인 아버지와 미생물학 교수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박노자는 상트페테르부르크대 극동사학과를 졸업하고 1996년 모스크바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그의 친가는 제정러시아 시절 박해와 학살을 온몸으로 경험하고, 혁명 이후에야 비로소 이주와 고등교육의 기회를 얻어 1930년대 레닌그라드에 정착한 유대인 집안입니다. 우크라이나계로 일찍이 볼셰비키 지지자가 되었던 친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RSDRP) 성향의 외가는 1905년 학살 때 목숨을 걸고 유대인들을 숨겨주기도 했습니다. 민족을 타파하자는 소련 초기의 국제주의에 충실했던 외할아버지는 유대계 외할머니와 결혼해 어머니를 낳았습니다. 모계를 중시하는 유대 전통에 따르자면 어머니도 유대인 아니냐고 묻자, 그는 “반 정도는 그렇죠. 근데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라고 반문했습니다. 국제주의자다운 태도였습니다. 어린 시절 유대인으로 놀림받은 경험을 물었습니다. 사적인 질문이었지만 답변은 역시 공적인 내용으로 바뀌었습니다.

-90년대 초반 러시아의 엄청난 경제난 속에서 한-러 통번역, 여행 가이드 등 다양한 일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러시아 보따리장수들을 데리고 하도 많이 다녀서 남대문은 눈 감고 돌아다닐 수도 있어요.(웃음) 명예 박사학위를 받으러 러시아에 온 수많은 총장·교수들의 통역도 맡았죠. 썩어빠진 어느 지방 사학재단 총장이 학술논문 하나 없이 석사논문만을 근거로 명예 박사학위를 받는 것도 봤어요. 저보다는 고려인 통역들이 고생을 많이 했죠. 여자 구해 달라고 하고, 반말하고, 성추행하고, 개돼지 대접을 했거든요. 백인에게는 조심하면서도, 못사는 동족에게는 극단적인 멸시와 차별을 하는 ‘지엔피(GNP) 인종주의’였어요. 고려인 후배 중에는 ‘관광객 안내를 계속하다가는 한국 문화까지 싫어져서 한국학을 그만두게 될 것 같다’고 가이드 노릇을 중단한 친구도 있었죠. 망국 이후의 러시아는 정상적인 사회 작동을 멈춘 상태였고요.”

-그 시기에 러시아로 유학 온 아내를 만났죠? 양가의 결혼 반대는 없었나요?
“옐친의 자유화로 물가가 백배쯤 뛰어버려 장학금으로는 빵 몇 조각도 못 사던 시절이에요. 그때 몇 년은 알바 한 기억밖에 없어요. 음악원에서 통역을 했는데 남한 유학생들이 소련인들을 많이 멸시했죠. 개인 레슨을 받으면서도 ‘저 교수에게는 10불 이상 주지 마라. 버릇 나빠진다’고 가난한 사람을 타자화하고 차별했어요. 아내는 소련 사람을 덜 멸시했죠. 망국 이후 아버지는 실직하고 어머니는 연금생활자였기 때문에 우리 집은 결혼을 반대할 여력도 없었어요. 굶어죽는 게 걱정이었으니까.(웃음) 아내 쪽은 처음에 좀 반대하다가 나중에는 따뜻하게 맞아주셨어요.”


97년부터 3년간 경희대에서 비정규직 교수로 러시아어를 가르친 박노자는 주말이면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한국사를 강의했습니다. 일요일을 같이 보내지 않는다고 아내의 불만이 많았지만, 인도·네팔에서 온 노동자들과 신라 불국토 사상을 함께 토론할 수 있었던 “너무 재미있는” 자원봉사였습니다. 99년에는 로버트 할리, 이한우와 함께 <한겨레>에 ‘서울 돋보기’라는 제목으로 글쓰기를 시작했습니다. 다른 필자들이 한국의 음식과 문화를 다룬 가벼운 글을 주로 쓴 데 반해, 박노자는 처음부터 박정희 독재, 베트남 파병, 양심적 병역거부 등의 무거운 주제를 들고나왔습니다. 논객 박노자의 화려한 등장이었습니다.
  
-2000년 노르웨이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보다 정규직이 되고 싶었어요. 국민의료보험과 연금이 있는, 소련과 비슷한 사민주의 사회에서 살고 싶기도 했죠.”


-2001년 출간한 <당신들의 대한민국>의 억대 인세를 ‘아시아의 친구’라는 단체에 기부했다고 들었습니다.
“인세가 얼마나 되는지는 잘 몰라요. 노르웨이에서 받는 월급이 있고, 정규직이니까 먹고사는 데 지장 없잖아요. 이민자 차별에 저항하는 단체와 연대하고 싶었고요. 저작권은 원칙적으로 없어졌으면 좋겠어요.”


-큰돈을 기부하고 가족들에게 미안하지는 않나요?
“아내에게 많이 미안하죠. 그래도 요즘 집안 노동을 많이 해서 죄악을 씻고 있어요.(웃음) 첫째가 2002년생, 둘째가 2011년생인데, 비정규직일 때는 아이 낳을 생각을 못했어요. 언제 쫓겨날지 모르니까요. 비혼과 무자녀가 비정규직의 유일한 무기잖아요. 비정규직 탈출하려면 전력을 다해야 하는데 아기가 있으면 불가능하죠. 비정규직 양산이 인간의 자연스러움을 차단하고 인구 재생산을 막는 겁니다. 둘째가 태어나면서는 제가 육아노동을 열심히 합니다. 그 전에는 아내가 오랫동안 혼자 고생했죠. 저도 죄인이라 말하기 뭣하지만, 지식인이 지을 수 있는 가장 큰 죄악이 집안일을 안 하고 공부만 하는 거예요.(웃음)”


-한국과 노르웨이를 오가며 많은 글을 쓰고 있는데 그 힘의 원천은 무엇입니까?
“미안함이죠. 제가 망국 후 러시아를 떠나지 않았습니까? 러시아에 남은 동료와 후배들은 시간강사 해도 생계가 되지 않아서 엄청난 고생을 해요. 한국에서 비정규직 생활을 같이 한 분들도 마찬가지고요. 혼자 잘사는 게 미안하죠.”


-한국으로 돌아올 계획은?
“애들 때문에 쉽지 않아요. 노르웨이에서 자란 첫째 아이에게는 한국의 불평등과 인권침해가 매 순간 충격이거든요. 아이는 저에게 한국에서의 활동을 접으라고도 해요. ‘한국 사회의 일상적 보수성을 보면 사회주의로 가기가 불가능하다, 시간 낭비하지 말고 노르웨이의 적색당 활동이나 열심히 하라’고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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