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기노 칼럼] 불장의 시대와 필름 한 통

아주 오래전 기억이다. 1999년 말부터 2000년 초반까지 대한민국은 ‘닷컴 열풍’으로 주식시장에도 광풍이 불고 있었다. 그때 놀기 좋아하던 한 고등학교 동창이 불쑥 전화가 왔다. 그는 “주식을 하는데 대박이 났다”면서 “너도 빨리 신세계에 뛰어들어라”며 흥분했다.
당시 증권 시황은 “주식을 안 하면 바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광기의 도가니였다. 그때만 해도 홈트레이딩시스템(HTS)이 보급되기 시작하는 시점이라 여전히 증권사 객장에 나가 시세 전광판을 보는 것이 익숙한 세대가 많았다.
그 친구도 아침 일찍 객장에 나가 붉고 푸른 전광판을 뚫어지게 바라본다고 했다. 그러면서 경제 공부도 열심히 한다고 하면서, 자신이 찍어주는 종목은 해볼 만하다며 나를 부추겼다.
물론 나는 그 흥분된 제안을 거절했다. 투자할 돈도 없었거니와 별로 친하지도 않은 내게 ‘대박 정보’를 쥐여주는 그 심리가 친구를 향한 우정인지, 아니면 자신의 성공을 과시하고픈 허영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후 친구 소식은 듣지 못했다. 그의 얘기대로라면 동창들 중에서 제법 부자가 될 수도 있었겠지만 그 친구의 대박 근황은 들을 수 없었다. 그러고 26년이 지나 그 동창생 생각이 문득 났다.
요즘 웬만한 커뮤니티의 가장 핫한 게시글은 ‘주식 수익 인증샷’이다. 몇천만원으로는 명함도 내밀지 못한다. 최소 수억원의 빨간색 숫자가 찍혀야 사람들이 ‘와’ 하고 탄성을 지른다. 주식이 대박난 게시자는 댓글에 축하글을 올리면 선착순 치킨을 쏘겠다고 게시판을 뜨겁게 달군다.
불장의 시대다. 얼마 전 오랜만에 만난 이는 ‘돈 안 되는’ 예술을 하는 친구였다. 평소 밥벌이는 제대로 하는지 늘 짠한 마음이 들던 친구였다. 그런데 그는 “주식 멘토가 있는데 그 사람 가르침대로 해서 돈 좀 벌었다”고 했다. 금액이 억 단위로 진입하는 걸 듣고 나는 사뭇 당황스러웠다.
“아, 내가 이 가난한 예술쟁이를 걱정할 때가 아니구나.”
뒷골이 뜨거워지면서 나도 조바심이 생겼다. 모 대형주를 샀다가 조급증에 노심초사병까지 겹쳐서 손절하고 두 손을 들고 말았던 옛날 생각도 났다. “그때 시간을 두고 조금만 참았으면” 하는 후회가 후두부를 강타할 때면, 요즘 주식 뉴스가 살짝 아프게 다가온다. 사실 나는 그 ‘암흑의 시간’을 참을 용기도, 버틸 배짱도 없었던 것이다.
최근 책상을 정리하다 낯선 필름통 하나를 발견했다. 그 속에는 후지필름 내츄라 1600 필름 한 통이 들어있었다. 지금은 단종돼 나오지도 않는다. 필름이 감겨 있는 걸 봐서는 촬영을 했던 것 같다.
주말에 현상소로 가서 스캔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촬영하다 실패해서 버린 필름이겠거니 포기했는데 뜻밖에 연락이 왔다. 그렇게 열어본 그 필름 속에는 9년 전의 시간이 그대로 잠들어 있었다.
딸아이가 처음 자전거를 배워 공원에서 신나게 자전거를 타는 사진, 엄마가 딸에게 책을 읽어주는 사진, 친구들과 봉사활동 계획을 짜느라 카페에 모여앉아 수다 떠는 장면...세월이 흘러 색은 바랬지만 그 안에 박제된 시간만큼은 소중한 추억이 되어 내 마음을 아리게 했다.
주식의 시간과 필름의 시간은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 내가 9년 전 모 대형주를 사서 계속 가지고 있었다면 아마 지금쯤 마음에 둔 카메라나 렌즈를 사는 꿈에 빠져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나는 그런 배짱도 인내심도 없었고 매일매일 시간에 쫓기며 살고 있다.
나는 시간과 타이밍을 지배할 재능이 없음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인간의 조급함과 무관하게 흘러간 시간은, 9년이 지나서도 이렇게 조용히 나를 위로해준다. 새해부터는 주식 부자 대신 시간의 부자가 되어 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이 글은 투데이신문 2026년 1월 9일자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