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기노 칼럼] 윤석열-이재명-한동훈의 3각 ‘체급 전쟁’
정치권이 한심하다. 민생의제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관련 법안을 처리하는 생산적 정치를 기대하는 것은 아니다. 최소한의 기본적인 예의나 관례마저도 이제는 깡그리 무시하거나 우습게 보는 게 습관이 돼 버렸다. 서로를 존중하는 것은 고사하고 매사에 누가 더 뒤틀린 언사로 상대를 조롱하고 약을 올리느냐에 따라 능력과 정치력이 인정받는 한심한 수준을 드러내고 있다.
대통령실 축하 난 ‘대치전’과 여야 대표 ‘생중계’ 논란을 보면 유치하고 저급한 한국 정치의 민낯을 그대로 보는 것 같다. 대통령실은 지금까지 제1야당 대표가 취임하면 하루 이틀 사이 정무수석이 국회로 찾아가 축하 난을 전달하고 덕담 및 상견례 자리를 마련해왔다. 면담 시간도 길지 않기 때문에 양측이 시간만 잘 조율하면 언제든 축하 난 ‘행사’는 성사 가능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취임 사흘째를 넘기고 있지만 대통령실은 ‘받아라’, 이 대표측은 ‘기다려라’ 하며 티격태격이다. 아무리 여야가 윤석열 대통령 취임 이후 한 번도 상대를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고 해도 이번 축하 난 해프닝은 도를 넘은 것 같다.
사실 양측의 속내를 보면 대통령실과 이재명 대표측의 해명을 귀담아 들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대통령실은 “이 대표가 당대표로 집무를 시작한 19일부터 축하 난을 전달하기 위해 이 대표 측에 예방을 타전했지만 아직 별다른 반응이 없다”며 자신들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하소연을 한다. 이에 대해 이 대표 측은 대통령실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라며 손사래를 친다. “날짜를 잡을 테니 기다려달라고 한 것일 뿐”인데 대통령실이 마치 이 대표측이 축하 난 받기를 거부한 것처럼 언론플레이를 한다며 불쾌한 기색이 역력하다.
기본적으로 축하를 하는 행위는 상대를 배려해주는 것이다. 상대가 기다려 달라고 했으면 일단 그 의견을 최대한 존중해 주는 게 맞다. 이런 점에서 대통령실이 하루 이틀 민주당의 반응이 미적지근하자 불쑥 ‘축하 난을 거부한다’는 식의 언론플레이로 정치적 관행을 ‘오염’시키려는 의도는 얄팍한 꼼수다.
이 대표도 법정에 출석하는 등 시간이 없다고는 할 수 있지만 대통령실의 축하 난 ‘행사’를 차일피일 미루며 확답을 해주지 않는 것은 관례 상 도리가 아니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이 대표가 취임 일성으로 윤석열 대통령에게 영수회담을 전격 제안했지만 그에 대해 대통령실이 일언반구 ‘맞장구’가 없었던 것에 대해 상당히 불쾌해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렇게 이 대표의 심기가 취임 첫날부터 틀어진 마당에 대통령실이 ‘축하 난’을 들고 염장을 지르러 온다고 하니 영 마뜩찮았을 수 있겠다. 제1야당 대표의 취임 첫 정치 제안을 대통령실이 보란 듯이 무시한 것에 대해 이 대표도 열이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이재명 대표 입장에서는 ‘내가 차기 대권 등극이 가장 유력한데 대통령이 감히 나를 만나주지 않느냐’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누가 더 잘못했느냐를 따지는 것은 유치한 아이들 싸움에 어른들이 끼어드는 격이라 의미가 없다. 그럼에도 지적하고 싶은 것은 대통령실이 여전히 이재명 대표를 제1야당 대표이자 국정의 파트너로 인정하지 않거나, ‘죽어도’ 그렇게 하기 싫다는 ‘기피증’이 역력하게 드러나는 것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윤 대통령은 지난 총선에서 참패한 뒤 그 ‘면피’를 위해 할 수 없이 여야 영수회담을 수락했지만 의미 있는 정치적 타협점이나 생산적 논의도 없이 ‘헛심’만 쓴 채 끝이 났다.
그리고 이번에 이재명 대표가 야당 당수로 취임하게 되면서 윤 대통령에게 영수회담을 다시 제안했다. 하지만 윤 대통령 입장에서는 “‘현안’이 없는데 왜 영수회담을 해야 하느냐”며 부정적으로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높다. “내가 잘 하고 있는데 무슨 참견이나 생떼를 쓰려고 하는지 알 수 없다”는 불쾌감도 녹아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제1야당 대표가 영수회담을 자꾸 대통령에게 개최하자고 하는 것은 대통령의 국정운영에 뭔가 중대한 실수가 있거나 야당 대표가 대통령 면전에서 직접 따져 물어야 할 것이 많다는 뜻으로 대통령실은 받아들이고 있다. 여기에는 윤 대통령이 여전히 이재명 대표를 자신과 ‘체급’이 같은 ‘영수’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뜻도 포함돼 있다.
자신은 국정을 총괄하는 ‘만인지상’ 대통령이고 야당 대표는 그 아래 체급이기 때문에 굳이 만나서 기분 나쁜 이야기를 들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윤 대통령의 이런 부정적 기류를 대통령실은 “국회 정상화가 먼저”라며 에둘러 말하고 있다. 그도 저도 아니면 ‘국회에서 한동훈을 이기고 오면 내가 만나주겠다’는 뜻이었을까.
그런데 윤 대통령이 지금 이렇게 한가하게 ‘체급 놀이’를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윤 대통령은 이제 총선 참패는 안중에도 없다. 그는 지금 건국절 논란과 극우 인사 중용으로 정국을 민생에서 역사논쟁으로 ‘억지 프레임’을 잡아나가고 있다. 역사논쟁이나 국가 정체성 문제는 여야가 아무리 샅바싸움을 한들 승자나 패자가 없다. 부동산 가격 급등이나 경제민생 하락 수치는 쉽게 드러나 정권의 책임론이 명백하지만 역사논쟁은 결론이 날 수 없는, 무한 뫼비우스의 띠에 갇힌 생산성 제로의 무용 아젠다다.
어차피 정치에서도 경제에서도 낙제라면 점수 매기기 곤란하고 지지층 ‘소몰이’에도 효과적인 역사논쟁이라도 판을 키워 위기를 모면해보겠다는 게 윤 대통령의 ‘주판알 셈법’ 아닐까. 이런 상황에서 이재명 대표와의 영수회담 ‘그림’을 윤 대통령이 ‘같이’ 그려주게 되면 정국의 프레임도 역사논쟁에서 민생으로 다시 강제 전환된다.
이재명 대표로서도 전당대회에서 85.4%의 압도적 당선으로 ‘개딸의 대표’라는 오명을 썼기 때문에 윤 대통령과의 영수회담을 통해서 ‘통 큰 지도자’의 면모를 보여줄 필요성이 있는데 대통령실이 가타부타 말이 없으니 조급하게도 느껴졌을 것이다. 하지만 덕담이 담긴 ‘축하 난’ 하나에도 좁쌀만한 정치력으로 민생의제를 외면하는 정치가 한심하고 씁쓸하다.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의 ‘여야 대표 회담 생중계’ 요구도 생뚱맞고 그 저의가 의심스럽다. 이재명 대표 취임과 함께 한동훈 대표가 적극 화답해 여야 대표 회담은 쉽게 성사되는 듯했다. 하지만 한 대표측이 회담 생중계를 제안하면서 일이 꼬여버렸다.
민주당은 여야 대표 회담이 생중계로 방송된 전례가 없는데도 왜 한 대표가 그런 ‘무리한’ 요구를 하는지 상당히 불쾌해하는 반응이다. 여야 대표 회담이 이재명 대표의 취임 때문에 성사된 것이라면 굳이 한 대표가 민주당이 언짢아하는 ‘생중계’를 왜 계속 요구하는지도 의문이다.
하지만 한 대표는 “민주당도 새로운 민주당이라고 새로운 정치를 하겠다고 하지 않았나”라며 “논의 과정을 국민들이 보는 게 불쾌할 일이 아니고 오히려 좋은 일”이라며 기고만장이다. 누가 들으면 한 대표가 ‘우주 토론 전사’쯤 되는 줄 알겠다. 토론으로 따지자면 이재명 대표도 원고나 자료 없이 몇 시간이고 혼자 ‘청산유수’를 떨 수 있는데 한 대표가 도대체 뭘 믿고 그런 제안을 하는지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여기에도 ‘체급’이 걸려 있다. 한 대표는 이 대표와의 회담 생중계가 전국에 방송되면 미리 보는 대선주자 토론회 효과를 톡톡히 누릴 수 있다. 대선이 3년이나 남았고 국민의힘 언저리에 오세훈 홍준표 등 ‘선배’ 대권주자들이 포진해 있는데 이 대표와의 생중계 ‘토론회’가 나가면 자신의 대권주자 등극을 기정사실화하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계산을 했을 것이다.
어차피 이재명 대표가 거절할 것이기 때문에 골치 아프게 토론 준비를 할 필요도 없다. 한 대표는 그냥 ‘내가 이제 이재명과 완전히 체급이 같다는 것만 이번 기회에 보여주면 된다’는 식의 자아도취 상상을 했던 것은 아닐까. 하지만 이재명 대표로서는 윤석열 대통령과 마주앉아 국정 전반을 논의하고 쟁점에 합의를 하는 ‘강하고 생산성 있는 야당 당수’의 모습을 보여줘야 하기에 한동훈은 안중에도 없다. 토론에서 한 대표에게 밀리기 때문에 자신감 결여로 생중계를 거절하는 것이 아니라 괜히 한동훈 체급을 ‘윤석열과 맞먹는’ 이재명 자신과 맞춰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사실 국민들이야 ‘축하 난’을 이 대표가 받든 말든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미우나 고우나 꽉 막힌 정국을 풀 사람은 대통령과 제1야당 대표뿐이기 때문에 보기 싫어도 만나서 의료대란이나 긴급한 민생 사안을 해결하는 시늉이라도 하라는 게 국민들의 언명인데 정치는 한심하게 ‘체급 놀이’만 하고 있다.
또한 회담이나 협상은 공개적으로 ‘니꺼 내꺼’ 떠들 수 없기 때문에 익명성과 기밀성이 생명인데 어떤 정치인이 그 밀행 (密行)한 과정을 전 국민들에게 낱낱이 드러내려고 하겠는가. 물밑 대화가 수면위로 까발려지는데 누가 솔직하게 대화를 하려고 하겠는가. 어차피 여야 대표 회담 생중계는 ‘쇼쇼쇼’가 될 것이 뻔하다.
집권여당 대표 한동훈은 그런 하나마나한 제안을 도대체 왜 하면서 불필요한 논란을 야기하는지 여전히 아리송하다. 이재명과 그렇게 같은 체급이 되고 싶으면 먼저 ‘자기 집’에서 인정받고 웨이트를 한껏 올려야 되는 것 아닌가.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윤석열 대통령도 한동훈 대표를 한참 아래 체급으로 보고 상대도 안 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니 국정이 제대로 돌아갈 턱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