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기노 칼럼] 야당이 윤석열 임기단축 개헌론을 꺼내 든 까닭
22대 국회가 개원하자마자 때아닌 개헌 논쟁이 불붙고 있다. 야권에서는 조국 조국혁신당 대표가 ‘7공화국론’을, 더불어민주당 김영배 의원이 ‘국민주도 개헌’을 주장하고 있고 우원식 국회의장은 22대 국회 개원 직후 헌법개정특위를 설치해 신속하게 개헌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여당 일각에서도 ‘개헌 열차’에 탑승할 준비를 하고 있다. 나경원 국민의힘 의원은 5월 27일 ‘대통령 임기 단축을 포함한 개헌 논의의 모든 문을 열어놓아야 한다’고 말했다가 당내 역풍을 맞고 ‘현 대통령 임기 단축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다’며 한발 물러섰다. 5월 30일에는 개혁신당 이준석 의원이 “국면을 리드하기 위해서는 대통령이 임기 단축 개헌도 고민해봐야 한다”고 주장하며 개헌론의 불씨를 이어가고 있다.
대한민국헌법은 ‘국가의 통치조직과 통치작용의 기본원리 및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근본 규범’으로서 한국의 최고 기본법이다. 헌법은 1952년 1차 개헌을 시작으로, 1987년 10월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한 9차 개헌까지 모두 9차례 개정이 이뤄졌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한국의 헌법 개정사는 독재자들의 권력 연장 야욕과 정치의 협잡으로 점철된 어둠의 역사로 평가받는다. 헌법 개정의 첫 스타트는 이승만 대통령이 끊었다. 그는 1952년 6.25 전쟁 난리통에도 국회에서 자신이 당선될 가능성이 없음을 깨닫자 장기 집권을 위해 강제력을 동원하여 헌법을 개정해버렸다.
당시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정부안과 의원내각제를 주 내용으로 하는 의회 발의안이 충돌하자, 정부와 의회는 협잡으로 양 개정안에서 발췌한 발췌개헌안을 만들어 공고절차도 없이 기립표결로 통과시켰다. 야당의 개헌안과 정부의 안을 절충한 데서 ‘발췌개헌’이라고도 한다.
이승만이 이렇게 자신의 권력을 연장하기 위한 야욕의 수단으로 헌법을 마음껏 유린한 후부터 개헌은 독재자들의 노리갯감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승만은 바로 2년 뒤인 1954년 그 유명한 ‘4사 5입’으로 또 다시 헌법을 더럽혔다. 2차 개헌은 대통령의 중임을 1차로 제한한 규정을 초대 대통령에 한하여 철폐하는 것이 골자로, 당시 국회에서 재적 203명 중 135표로 개헌선(재적 2/3인 135.333)에 0.333인이 미달되며 부결되었다. 의장은 부결을 선포했으나, 2일 후 ‘4사 5입’ 이론을 내세워 개헌선을 135표로 수정하여 개헌을 선포하였다.
이 ‘4사 5입’ 파동은 한국 헌정사 최대의 수치로 기록된다. 사람의 몸을 쪼개 0.5가 넘으면 ‘인간’으로 해석한 실로 어처구니없는 정치의 장난질로 인해 헌법은 권력자가 손만 대면 그냥 동호회 규칙 바꾸듯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다는 후진적 인식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1960년 6월에 이뤄진 3차 개헌(제2공화국)에 이르러서야 헌법 개정의 본래 취지가 비로소 되살아났다. 4·19 혁명 후 내각책임제로 전환하는 개헌이었다. 1960년 11월에 이뤄진 4차 개헌은 3·15 부정선거 관련 반민주 행위자 처벌을 위한 소급적용을 허용하는 헌법 부칙만 개정됐다.
그 후 헌법 개정은 또 다시 독재자들의 권력연장 수단으로 전락하고 만다. 1962년 12월 이뤄진 5차 개헌(제3공화국)은 박정희 대통령이 5·16 쿠데타(1961년 5월) 발생 후 대통령제로 전환해 본격적인 독재의 길을 연 것이었고, 1969년 6차 개헌은 박정희의 3선을 위한 목적으로 단행됐다. 1972년 7차 개헌(제4공화국)은 박정희 영구독재정권을 꿈꾼 유신헌법으로의 개정이었다.
그 후 박정희 정권이 몰락하고 전두환이 권력을 잡았던 1980년에 8차 개헌(제5공화국)이 이뤄졌다. 당시 전두환 노태우를 중심으로 하는 신군부 세력은 12·12사태로 정권을 장악한 뒤 국회를 해산하고 국가보위입법회의라는 초헌법적인 기구를 만들어 헌법을 다시 제정하고 국민투표로 이를 확정하였다. 이 헌법은 전면 개헌으로서 대통령을 간선으로 뽑고 대통령의 임기를 7년 단임으로 하는 것이었다.
전두환 군부정권의 독재에 항거하며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던 국민들의 저항은 1987년 6.10 항쟁으로 그 정점에 이르렀다. 국민들의 응축된 민주화 열망의 에너지는 1987년 9차 개헌(제6공화국)으로 그 결실을 맺었다. 헌정 사상 최초로 여야 합의를 통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 이뤄진 것이었다.
헌법 개정의 역사는 주로 독재자들의 권력 사유화를 위한 수단이나 위기 정국 탈출을 위한 비상구로 인식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유혹은 9차 개헌 이후에도 권력자들에 의해 시도되기도 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2016년 10월 24일 박근혜 대통령이 뜬금없이 밝힌 개헌론이었다.
당시에는 ‘최순실 게이트’ 의혹이 정점으로 치닫고 있을 때였다. 대통령의 목에 직접 ‘최순실 게이트’라는 칼날이 들이닥치자 박근혜는 그 수습에 올인하기보다 대통령 4년 중임제 개헌 추진으로 위기를 모면하려 했다. 하지만 국면전환 꼼수라는 지적과 차기 정권 재창출을 위한 포석이라는 비판에 직면해 대통령이 띄운 개헌론은 흐지부지되고 말았고 정국은 탄핵이라는 격랑 속으로 빠르게 휩쓸려 갔다.
그렇다면 이번 22대 국회가 문을 열자마자 다시 피어오르는 개헌론은 어떤 발화지점에서 불길이 일고 있는 것일까. 이번에 제기된 개헌론은 권력을 가진 대통령으로부터 촉발된 것이 아니라 야당에서부터 먼저 터져 나오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개헌이 주로 권력을 가진 쪽에서 시작하는 국면전환용이나 정권연장 수단으로 악용된 전례에서 볼 때 이번에 야당에서 주도하는 개헌론 또한 그 ‘전통’이 들어맞는 것 같기도 하다. 지난 4.10 22대 총선에서 190석 이상을 휩쓴 더불어민주당은 윤석열 대통령을 능가하는 권력집단이 됐기 때문이다.
이재명 대표가 ‘여의도 대통령’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개헌이 주로 권력을 가진 쪽에서 자신들의 정치적 이득을 더 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된 역대 사례를 볼 때 막강한 의회권력을 선점한 야당이 개헌을 추진하는 것도 이상할 것이 못 된다.
하지만 야당에서 제기되는 개헌론은 그 명분이나 적절성 면에서 과연 타당한 것인지 의구심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민주당은 지난 총선 때까지만 해도 윤 대통령에게서 탄핵 사유가 발생하면 탄핵을 추진하겠다는 점을 분명히 해왔고 개헌은 입 밖에도 내지 않았다. 실제로 이재명 대표는 4.20 총선 한달여 전인 지난 3월 강원 춘천중앙시장 방문 뒤 기자회견에서 “그 서슬 퍼런 박근혜 정권도 우리가 힘을 모아서 권좌에서 내쫓지 않았나”라며 대통령 탄핵론을 띄웠다가 그후 입조심을 하기도 했다.
조국혁신당 조국 대표는 아예 윤 대통령을 끌어내리기 위해 개헌과 탄핵을 동시에 추진하겠다고 공개적으로 천명한 바 있다. 그런데 22대 국회가 개원하면서 잇따라 터져 나오는 개헌론을 보면 야당의 좌표가 확실히 탄핵에서 개헌으로 톤다운 된 측면이 있다. 화장실 급하게 들어갈 때와 느긋하게 나올 때가 다른 것인지, 현재 야당이 제기하는 개헌론은 그 탄착점이 탄핵과는 확연히 다르다.
야당에서 뜬금없이 윤 대통령 임기단축을 전제로 한 개헌론을 주장하는 것은 대통령이 죄가 있으면 즉각 권좌에서 끌어내리겠다는 탄핵이 아니라 죄가 있기는 하지만 임기단축을 위한 개헌에 대통령이 동의를 하면 줄어든 임기동안만큼은 ‘살려는 줄게’라는 뜻이 된다.
이 과정에서 이재명 대표와 조국 조국혁신당 대표는 윤 대통령 임기 도중 ‘교도소’에 끌려갈 수도 있는 사법리스크를 재판 지연 등으로 원천 차단시킬 수도 있다. 윤 대통령이 야당과 빅딜을 통해 임기단축 개헌론에 이심전심으로 합의해준다면 이재명과 조국의 사법리스크는 그 과정에서 공중분해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대통령 임기단축 개헌론은 윤 대통령이 확실히 결심을 하고 야당의 요구를 들어주는 모양새가 되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윤 대통령이 자신의 ‘개헌 협치’ 파트너인 이재명이나 조국을 감옥에 넣는 무리수를 둘 수는 없다.
지난 총선에서 궤멸적 참패를 당한 윤 대통령은 지금 궁지에 몰릴 대로 몰려 있다. 자칫 탄핵열차에 치여 임기 도중 불행하게 하야하는 것은 물론 사법처리까지 받을 가능성도 있다. 임기단축 개헌이 대통령 탄핵 미사일을 요격해줄 수 있는 ‘야당의 패트리어트’라는 판단을 할 경우 윤 대통령이 흔쾌히 개헌에 동의해주고 자신도 ‘역사에 남는’ 대통령으로 편하게 귀가할 수도 있는 것이다.
지금 윤 대통령에게는 야당의 개헌론에 맞설 이렇다 할 방패가 별로 없다. 추경호 원내대표가 이끄는 국민의힘이 있기는 하지만 당 대표 자리에 한동훈 전 비상대책위원장이라도 들이닥칠 경우 대통령의 ‘여당 프리미엄’은 거의 사라진다고 봐야 한다. 오죽했으면 윤 대통령이 민주당에 입당할 것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올까.
보수층도 점점 윤 대통령에게 등을 돌리고 있고 국민의힘도 22대 총선 이전의 허수아비 거수기가 아닌 반윤 대권주자들의 영향력이 점차 확대될 경우 윤 대통령이 피신할 ‘소도’는 개헌지대같은 파격적인 방식밖에 없다. 야당이 ‘탄핵은 봐줄 테니 임기단축 개헌에 합의해줘’라고 요구할 경우 윤 대통령으로서는 자신의 한 몸(또는 김건희와의 두 몸)이라도 지키기 위해 덥석 그 제안을 받아들일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야당의 대통령 임기단축 개헌 추진은 윤 대통령에게 안전한 하야를 보장하는 일종의 안전판일 수 있다. 야당은 대통령의 탄핵 사유가 분명할 때 탄핵 추진을 통해 새로운 권력을 창출해야 함에도 그 대의를 무시하고 적당한 타협을 이뤄내려 한다면 그것은 야당의 안정적인 권력승계를 보장받겠다는 불순한 장난질일 뿐이다. 임기단축 개헌론이 이재명 조국의 ‘인신구속’과 윤 대통령의 남은 임기를 바꿔 먹는 ‘권력 나눠먹기 야합’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개헌의 역사를 보면 먼저 그것을 띄우는 쪽이 ‘범인’이라고 봐야 한다. 4.19와 6.10으로 촉발된 3차, 9차의 ‘국민 개헌’을 제외하면 나머지 개헌들은 어떤 식으로든 권력자들의 손이 탄 정략적 개헌이었다. 야당이 10차 개헌(7공화국)에 5.18 정신 수록, 지방분권, 검찰개혁 등을 명문화하자고 애드벌룬을 띄우지만 그 풍선 속에는 여야 기득권의 ‘권력 편안하게 나눠먹기’라는 오염물질이 들어있을 수도 있다.
야당은 임기단축 개헌으로 윤 대통령에게 면죄부를 주어서는 안 된다. 특히 야당이 자당 대표들의 사법리스크를 해소할 목적으로 ‘개헌 장난’을 친다면 국민들의 엄중한 심판을 받을 것이다. 대통령이든 야당 대표든 죄를 지었으면 그 죄를 달게 받으면 된다. 그것이 역대 개헌 악용의 최후가 보여준 역사의 교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