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최틀러’ 최병렬이 윤석열에게 남긴 것

성기노피처링대표 2022. 12. 6.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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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왼쪽)과 고 최병렬 전 한나라당 대표. (사진=연합뉴스)


최병렬 전 한나라당 대표가 지난 2일 별세했습니다. 향년 84세(1938년생)입니다. 최병렬은 타고난 관운을 자랑했습니다. 언론인(조선일보 편집국장)에서 출발해 청와대 정무수석, 문화공보부 장관, 서울시 마지막 관선 시장과 국회의원 4선 등을 거쳐 야당 대표까지, 대통령 빼고 거의 모든 공직을 경험한 흔치 않은 정치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한나라당 대표로서 헌정사상 초유의 대통령(노무현) 탄핵소추를 주도한 장본인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대통령 측근비리 특검을 관철시키기 위해 보수정당 대표 최초로 ‘단식’이라는 ‘과격한’ 투쟁 무기를 꺼내 들어 논란의 한복판에 서기도 했습니다. ‘최병렬’의 정치 이력을 되짚어보면서 그의 ‘후예’인 윤석열 대통령이 묘하게 오버랩됩니다.

최병렬 전 대표는 전두환-노태우-김영삼의 3대 정권을 이어가며 ‘천운’을 누렸습니다. 최 전 대표는 강력한 카리스마와 저돌적인 스타일로 어떤 조직을 가든 막강한 장악력을 보였습니다. 최 전 대표는 윗사람들이 안심하고 일을 맡길 만큼 유능했고, 그 특유의 ‘일머리’로 요직을 두루 거쳤습니다. 1985년 전두환 대통령은 조선일보에서 일하던 그를 정치에 입문시킵니다(12대 총선 민주정의당 전국구 비례대표). 그 뒤 노태우 대통령 당선에 기여한 그는 그 공로로 대통령비서실 초대 정무수석비서관에 임명됩니다. 이때 ‘5공 청산’을 주도하면서 ‘능력’을 인정받습니다. 이후 문화공보부장관, 노동부장관 등을 거치며 노태우 정권의 주축이 됩니다. 

1992년 제14대 총선에서 또 다시 전국구로 국회에 입성한 최 전 대표는 14대 대선에서 ‘신민주계’로 변신하며 김영삼 후보 당선에 기여합니다. 김영삼 대통령으로부터도 ‘일머리’를 인정받아 성수대교 붕괴 사고 이후 마지막 서울시 관선시장으로서 민심 수습을 위해 긴급 투입되기도 했습니다. 한 언론사가 발표한 ‘역대 공무원 베스트 10’에 뽑힐 정도로 최병렬 전 대표는 그 ‘행정적’ 능력을 인정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정치적’으로는 그리 유능하지 못했습니다. ‘행정’은 리더의 뚝심과 카리스마만으로 아랫사람들을 독려하고 몰아붙이면 성과를 낼 수 있지만 정치는 ‘다 같이 어깨 걸고’ 보조를 맞춰 ‘함께’ 결승선에 도착해야 이기는 게임입니다. 아무리 똑똑하고 출중한 능력을 가진 리더라도 정치에서는 ‘원맨쇼’가 없습니다. 그가 지난 2003년 노무현 정권 때 국회 과반에서 12석을 초과하는 거대 야당 한나라당의 대표로 있을 때 ‘대통령 탄핵’이라는 한국 정치사상 최악의 극단적인 여야 대결이 벌어졌다는 점은 많은 시사점을 안겨줍니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안을 통과시킨 한나라당 최병렬(왼쪽), 민주당 조순형(오른쪽) 대표와 자민련 김종필 총재가 2004년 3월 13일 오후 국회에서 정국안정 방안 등을 논의하기 위해 열린 3당 대표회담에서 만나 자리를 권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최병렬 전 대표가 한나라당 수장으로 올라섰던 2003년 6월은 보수정당에게는 최대의 시련기였습니다. 이회창 전 대선후보가 선거에서 연거푸 패배하게 되면서 당은 극심한 후유증을 겪고 있었습니다. 대선 패배 후 당을 수습할 만한 ‘차기 대권주자’는 보이지 않았고 이 과정에서 대선 후보 경선에서 2위를 했던 ‘최병렬 카드’가 부상했습니다. 그는 ‘포스트 이회창’과 제1야당 단일지도체제의 대표라는 막중한 지위를 부여받았습니다. 당 대표로 성과를 인정받으면 차기 대권주자로 ‘점프 업’ 할 수 있기 때문에 최 전 대표에게는 천금 같은 기회였습니다. 


그때 권력의 양지만을 누리던 보수정당이 10년 동안 야당으로 지내야 한다는 것은 암울함을 넘어 극도의 권력 금단증세에 시달리게 하는 고문과도 같았습니다. 그 금단증세를 풀기 위해 한나라당은 노무현 대통령 탄핵이라는 극단적인 ‘각성제’를 사용하기에 이릅니다. 바로 그 대통령 탄핵을 주도했던 장본인이 최병렬 전 대표였습니다. 결과적으로 대선 불복이 돼 버린 이 사상 초유의 탄핵 시도는 한국 정치를 불복과 위력의 대결장으로 만드는 시발점이 됐고 ‘협치’의 신사협정이 무너져버린 여야는 만성적인 정쟁의 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최 전 대표는 특유의 뚝심으로 노무현 대통령 탄핵을 밀어붙였지만 그것은 자신의 발목을 잡는 족쇄가 됐고 지금까지도 여야의 극단적 대치극을 유발하는 ‘시원’을 제공했습니다. ‘최틀러’ 최병렬의 강경하고 비타협적인 스타일은 ‘행정’에서는 통했지만 정치에서는 대표직 단명(9개월)과 정계은퇴를 재촉하는 독이 됐던 것입니다. 

최 전 대표는 ‘길거리 투쟁’ 방식과는 거리가 멀었던 보수세력에 처음으로 단식이라는 극단적 저항 방식을 도입한 정치인으로도 기억됩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국회에서 가결된 측근 비리 의혹 관련 특검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하자 최 전 대표는 항의의 표시로 11월 26일부터 단식에 돌입했습니다. 그는 ‘나라를 구하겠습니다’라는 구호가 걸린 현수막 앞에서 트레이닝복을 입고 호기롭게 단식을 시작했지만 민심의 반응은 냉담했습니다. 누가 봐도 ‘기득권 금수저’로 인식되는 최병렬 전 대표가 국민을 위해 곡기를 끊는다는 사실이 ‘상식적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했던 것입니다. 특히 통상적인 방식과 달리 단식 ‘음식’으로 게르마늄 생수와 쌀뜨물, 죽염을 복용할 예정이라는 사실이 비서실을 통해 알려지면서 ‘부자 명품 단식 하는 것이냐’는 비판의 목소리도 나왔습니다. 

 

2003년 11월 27일 특검거부 철회를 요구하며 단식농성 이틀째를 맞은 한나라당 최병렬 대표가 위로 차 방문한 당직자들에게 현 정권의 실정을 토로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필자도 최 전 대표 단식 당시 ‘그래도 건강을 위해 육각수(인체를 구성하는 수분은 육각수 형태가 많기 때문에 체내 세포가 가장 좋아하는 물로 알려짐)를 마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취재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최병렬 전 대표가 단식 기간 동안 몸을 뉘였던 베개가 세 번이나 바뀌었던 것도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단식 초기 최 전 대표는 방석을 접어 베개 대용으로 사용하다가 그를 위로 방문했던 대학후배가 방석을 접어서 베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화문석 베개’를 선물했다고 합니다. 이 베개는 목침 위에 화문석을 덧씌운 고급 제품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뒤 최 전 대표가 딱딱한(?) 목침을 베고 있는 장면을 텔레비전을 통해 본 당시 노송가구 노태상 회장이 ‘잣나무 베개’를 또 다시 보냈다고 합니다. 당시 최 전 대표의 한 측근은 “잣나무 베개는 옛날 임금님이 베던 것으로 목침보다 편안해 단식 끝 무렵에는 최 대표가 주로 이것을 벴다”고 말했습니다. 최병렬 전 대표는 여전히 ‘귀족정당’의 당수로서 서민들의 눈높이와는 거리가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웰빙단식’ ‘단식다이어트’라며 그를 조롱했습니다. 정치인의 단식에 대해 ‘웰빙’이니 ‘다이어트’니 하는 야유와 조소가 시작된 것은 최 전 대표의 단식이 최초였습니다. 최병렬과 그의 ‘후예’였던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나 김성태 자유한국당 원내대표의 단식도 국민들의 공감과 지지를 그리 받지 못했습니다. 이는 정치인의 ‘공감 감수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워 주는 사례입니다. 

사실 최병렬의 단식이 특검을 추진할 정도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측근 비리가 심각했는지, 아니면 민생을 팽개치고 국회 등원도 거부하면서까지 극단적인 단식 투쟁을 펼쳤던 거대야당 대표의 ‘위기탈출 쇼맨십’이 문제였는지는 역사가 평가할 것입니다. 보수진영 일각에서는 최병렬 전 대표가 열린 리더십으로 소장파를 중용하고 웰빙정당으로 비판받던 한나라당에 ‘단식투쟁’과 같은 야성을 불어넣은 야당 수장으로 평가하는 분위기도 있습니다.


 

하지만 최 전 대표는 힘 있는 야당 대표의 지위를 이용해 대통령 탄핵과 단식 등의 강경책으로 밀어붙이다가 그 역풍을 맞고 대권의 꽃도 피우지 못한 채 자신이 키운 소장파(남원정)의 주도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민심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권위주의적인 권력 운용을 보인 것도 한몫했습니다. 결국 그는 ‘이회창-박근혜’로 이어지는 보수 본류의 권력 이양기에 잠깐 다리를 놓은 ‘징검다리 정치인’으로 남겨진 채 씁쓸하게 정계를 떠나야 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해 12월 대선 과정에서 이재명 민주당 후보를 향해 “이 후보의 가장 큰 문제는 일머리가 없다는 것”이라고 비난할 만큼 자신의 ‘일머리’를 부각시킨 바 있습니다. 하지만 일머리에 관한 한 ‘최틀러’ 최병렬에 비할 바가 아니라고 봅니다. 그럼에도 최병렬 전 대표는 ‘민심을 얻는’ 정치에서는 결국 실패한 정치인으로 기억됩니다. 정치에서 일머리 운운하며 자신만의 능력을 뽐내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습니다. 혼자 잘나서 대통령이 된 것처럼 여전히 착각 속에 빠져 있는 한 지도자에게 ‘최틀러’ 최병렬의 ‘실패학’이 작은 교훈을 줬으면 합니다. 또한 보수정당의 대표적인 강경파였던 최병렬 전 대표의 극단적인 ‘대결 정치’ 말로가 어떠했는지도 한번 되돌아봤으면 합니다. 

 

(여성경제신문 12월 6일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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